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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10. 2023

하얀패모 이야기 5-맞수

<맞수>

남학생들의 성적 향상과 여학생들의 하락에 힘입어 녀석의 기고만장은 하늘을 찌르더니 2학기를 넘어 가을 무렵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때는 입시를 얼마 남기지 않는 가을 체력장. 우리 학교는 남녀가 다른 남중 여중으로 가 각각 따로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남학생들 일정이 먼저 잡혔다. 우리는 1회로서 선배가 없는 학교라 남학생들은 늘 선배들이 있는 타 학교의 시비를 불안해하며 살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우리 학교 배지를 보이면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단지 선배가 없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어 더러 매를 맞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번엔 아예 남학생들이 그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늘 그것들은 원수로 여기는 나였지만 그들도 나의 백성인 지라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 못난 것들이 가서 빌빌대면 어쩌나. 남학교에선 남녀공학 여학생들이 부러움의 대상이라 던데 여학생들이 가서 응원이라도 해주면 저것들 기가 사는 건가? 음료수라도 사가야 하나......?’

허나 이런 등등의 고민은 반장이라는 왕재수의 얼굴이 떠오르자 싹 사라졌다. 

‘흥, 저 놈은 그러면 더 기고만장할 것이다. 내 그 꼴은 못 보지......’

결국 나는 한 녀석 때문에 다수가 불행해지는 결정을 하고선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막상 당일 날이 되자 걱정되고 저절로 응원하는 마음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튿날 흥분된 마음을 감추고 분위기로 결과를 짐작해 보려고 교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일단 녀석들의 표정이 밝고 왁자한 것으로 보아 결과들이 좋은 것 같았다. 심각한 얼굴들도 없는 것으로 보건대 폭력 등의 사건도 없던 것 같았다. 늘 미간에 주름을 잡고 사는 나 같은 험한 아이를 부반장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몇몇 해맑은 남학생들은 다가와서 무용담 삼아 종알종알 체력장 때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심지어 ‘부반장, 나 잘했지?’하며 자랑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대견한 생각에 미간의 주름이 풀고 미소를 띠려고 할 찰나 느닷없이 녀석이 그들을 나무랐다.

“됐어. 이 의리 없는 얘들한테 넌 자존심도 없냐?”

녀석은 무슨 개선장군처럼 들어와 나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에게 쏘아붙이고 내 앞을 휙 스치고 지나가며 중얼거림도 아니고 대놓고 따지는 것도 아닌 그 특유의 말투로 한 마디 더 했다. 

“여학생들이 오빠들 힘들게 뛰는데 물도 한 방울도 안 가져왔냐?”

무사히 체력장들을 치렀다는 반가움에 앞서 짜증이 확 밀려왔다. 

‘저게 미쳤나? 오빠들?’

뭘 믿고 녀석이 갈수록 날 막 대하는 건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분하고 분할 따름이었다. 당연한 보복으로 녀석도 여학생들의 체력장 때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반들은 여학생 남학생 서로 음료수다 뭐다 챙겨주고 격려하고 분주한데 우리 반은 녀석과 나의 대결로 핑크 빛 라인 선상에 있는 커플까지도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녀석은 마치 내게 어떤 주도권도 잃지 않겠다는 듯 내가 하면 지지 않고 꼭 한 술을 더 떴다. 내가 기타를 배워 학교에서 저녁시간에 교정에서 여학생들과 찬양을 인도하면 녀석도 언젠가부터 더 많은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기타를 배워 꼭 같은 짓을 했다. 생물시간에 생식에 대한 수업을 하기 전에 한 노처녀 선생님께서, 

“여기 아직도 독신으로 살겠다는 바보가 있나? 어디 한 번 손들어봐.” 

하시면 남자 쪽에서는 반장, 여자 쪽에서는 나 이렇게 둘 만 손을 들었다. 그때 우리가 무언으로 서로 주고받았던 사인. 

‘흥!’

이렇게 녀석은 사사건건 나와 정면 대결을 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쯧쯧, 역시나...... 저것들 둘은 별난 독종들 이야......”

이렇듯 나는 녀석이 정말 싫은데 우연히 관심사가 비슷해서 어쩌다 대화는 가끔 엮이게 되고 녀석은 늘 남자의 권위를 옹호하고 여성을 무시하는 입장에서 나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결론은 어느새 항상 대결 구도가 되어 끝이 났다.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빼면 녀석과 나는 우연히 비슷한 점도 많았다. 독신주의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광팬에 둘 다 가는귀가 먹었는지 잘 못 듣는다는 것 등...... 하지만 녀석은 가끔 내가 생각하지 못하던 의견으로 나를 ‘당황’ 시켰다. 예를 들자면 독립투사들에 대해 내가 열렬한 예찬을 하며 그분들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을 부르르 떤 다면 녀석은 대뜸, 

“나라면 독립투사 안 하지. 나 같으면 일본의 관료가 되겠다.”라고 하는 거다. 

내가 기가 막혀서, 

“뭐가 어쩌고 어째? 일본의 관리? 정신이 나갔어? 일본의 앞잡이가 되겠다는 게 할 말이냐?”라고 물으면 정색을 하고는, 

“앞잡이가 아니고 관료 라 했다.”라고 나불나불 입을 놀렸다. 

“오냐 그래, 관료. 그게 지들 입맛에 안 맞추면 가능하다던? 그 놈들 입에 맞으면 그게 앞잡인게지!”

“너는 매사 그렇게 극단적이더라. 앞잡이가 되지 않아도 인재로서 인정받으면 관료가 될 수 있고 그들의 법을 이용해 피해를 줄이고 좀 더 냉철하게 싸워 보자는 거지. 간디처럼. 주먹 한 번 안 Tm고도 적들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인도가 정녕 영국 것이면 영국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잖아? 난 그렇게 싸울 거야. 부반장 너도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봐라. 아 그리고 간디 영화 좋더라. 꼭 한 번 봐. 너도 좋아할 거야......(싱긋)”

녀석은 얄밉게 말하고 또 휙 사라졌다.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 대꾸할 시간도 없었던데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좀 치사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나는 내 자존심을 보호하는데 생각을 집중했다. 

"아!!!!!!!!!! 저 저저 저거! 지가 어떻게 내 영화 취향을 안다고 저따위로 말해? 간디는 나도 원래 존경하거던? 글고 웃긴 왜 웃어! 왜 저따구로 웃어, 재수 없게!" 

녀석 같은 조국의 멀쩡한 인재가 일본의 관료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분했지만 순간 더 나를 노엽게 했던 건 어이없게도 그 웃음이었다. 싱. 그. 감히 내게 저.렇.게. 웃다니! 정말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남학생들 중 내게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종족들은 없었다. 농담이나 웃기는 이야기 때문에 웃을 수는 있어도 그런, 아무 이유 없는, 친밀한 이에게나 보내는 미세하고도 편안하게 ‘싱긋 웃는 웃음’ 은 주고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 또한 그런 웃음은 아무에게도 준바 없었다. 한 번도 머릿속에서 그 두 웃음을 구분하여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그 둘은 분명 내게는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모든 이에게 허락된 것이나 후자는 누구에게 허락된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외부로 내보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지금 녀석이 내게 아무렇지도 한 것이다. 그렇게 녀석은 내 인생에선 처음으로 쳐 대는 사고가 한둘이 아니었고 쳐대는 것마다 대형 사고였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서슴없이. 가장 속이 상했던 건 상반된 우리의 모습이었다. 줄곧 독재자의 고독을 씹으며 측근들 한 둘과 다니는 나에 비해 녀석은 거의 항상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그 차이는 분명 내게 버거운 부담감과 고민으로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 성경 공부 모임에 함께 참여하면서 녀석은 꽤 많은 남학생들을 전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녀석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수 십 가지 비료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 갔다. 이 녀석은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아주 이. 상. 한. 녀석이었다. 간이 아주 큰, 생전 처음 보는 나의 ‘맞수’였다.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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