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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10. 2023

하얀패모 이야기 12-휴전협정위반-대공습

휴전협정위반-대 공습

 <휴전협정위반-대 공습>

나는 드디어 졸업을 했다. 무한한 실망감으로 시작했던 나의 중학 생활. 그러나 점점 이 학교와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학교 앞 문방구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무언가 참 아쉽고 쓸쓸한 이별이었다. 이제 곧 숨 막히는 대학 입시의 3년 생활로 들어가야 한다는 공포감은 졸업에 대한 슬픔을 배가시켰다. 그러던 차에 녀석에게 또 전화가 왔다. 이제 녀석의 전화는 놀라움도 무엇도 아닌 그저 있는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책이 잘 나와서 반장의 자격으로 선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 또 나도 뭔가를 답례해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짜증부터 났다. 그 없는 것 없는 녀석에게 뭔가 사 주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기에 이런 고민을 제공하는 녀석이 참 귀찮았다. 또한 항상 그런 식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사 하듯 하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어쩌겠는가? 졸업도 한 마당에 ‘야, 이제 반장 노릇 그만해라.’ 하며 거절하는 것은 더 우스운 꼴인 것을. 더구나 선물은 책이라고 했다. 무슨 가톨릭 신부와 빨갱이 읍장이 싸우는 얘기라나. 

‘신부와 빨갱이 읍장? 이건 또 뭐야. 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또 경험하게 되는구나.’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가 그 책이란 것을 받아 왔다. 가고 오는 길에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한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난 또 뭘 사지......’

책 첫 장을 넘기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부반장, 일 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정말 즐거웠다. 허수아비.’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나는 한 줄이었다. 녀석은 이중적 의미를 즐기는 취미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즐거워? 나는 너 때문에 학교 가기가 고통스러웠어! 그리고, 허수아비? 끝까지 내가 월권했다고 지금 시위하는 건가?’

‘허수아비’ 란 녀석이 내게 자주 반의 실권자는 나라며 자신을 빗대어 부르던 말이기에 나는 그 한 줄 글이 순수하게 해석되지 않고 녀석의 마지막 딴지 같았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근데 그 책 사이엔 편지도 있었다. 

‘힉! 이게 뭐야? 이 자식이 왜 편지까지 쓰고 난리야? 끝까지 이렇게 길게 따지거나 충고질 할 게 있다는 게야 뭐야? 뒤끝? 나도 뭐 또 답장 써야 돼 말아야 돼 이거? 아, 이 끝까지 웬수.’

모든 논쟁과 딴지를 다 받아쳐 주리라는 단단한 각오와 함께 엷은 분홍색 그 봉투를 여는 순간……그 내용은 나에게 그날 밤을 꼬박 새울 백팔 번뇌를 안겨 주었다. 사연인즉슨 자기 여자 친구가 되어 달라는 거다. 힘들고 어려운 때 서로 돕고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친구지 뭐 별게 여자 친구라고 다를 게 있겠냐고 거절할 이유까지 없게 해 가지고선. 거절을 하자니 저쪽의 순수한 의도를 비순수하게 해석하는 꼴이 될뿐더러 늘 남성과 당당하게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내가 이 제의를 거절할 마땅한 명분이 없게 되고 수락을 하자니 내 보수적 삶의 원칙들이 무너지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이성 친구가 웬 말인가? 이 재수에 웬수 곱빼기! 


다음은 문제의 그 편지의 전문이다. 


To OO.

OO. 네가 비록 나보다 체구가 작지만 나는 네 앞에만 서면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가를 느낀다. 정말로 지난 일 년간의 3-2의 실세로서의 실력, 그리고 이번 학급 문집을 만드는데 네가 기울인 정성과 노고에 너를 존경하는 한 인간으로서 뜨거운 갈채를 보내는 바이다. 지난 1년과 또한 3년간의 수요 모임(학교 선생님과 만들었던 성경공부 모임) 기간 중에 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여자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너와 일부의 여자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모든 여자아이들이 그런 면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네 덕택에 여자아이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덕분에 내게 있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내가 소위 "남성 우월주의”를 가지게도 되었다. 어쨌든 간에 내가 너를 다른 여자애들보다는 틀리게 보았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대부분의 철이 덜든 여자아이들보다 너는 꽤나 철이 든 것 같다. 남자아이들 중에서도 너 정도로 철든 애는 드물 단다. 그래서 이야기인데 어때?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 용의가 있는가?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너를 여자애로 느껴본 적이 없단다(미안한 이야기지만). 너도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있지. 음식 만들기, 바느질할 때를 제외하곤 여자가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진짜로 철든 남자친구를 사귀는 셈 치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친구라고 별 것 있겠는가? 힘들 때 서로 위로해 주고 즐거울 때 함께 기뻐해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상담해 가며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친구가 아닌가? 물론 이 제안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너의 생각에 너무 이르다든가 안 좋다는 생각이 들면 No라고 해도 괜찮아. 그러나 한 가지, 비록 네가 Yes건 No건 어떠한 대답을 하더라도 신앙과 임원직의 선배로써 모자란 반장이었던 나를 도와주었던 부반장으로서 또한 내가 보기에 좋은 성격을 가진 인간 OO으로서 내 인생의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란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은 반의 대표인 반장으로서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는 돈 까밀로라는 신부와 빼뽀네라는 빨갱이 읍장이 나온다. 나는 언제나 꿈이 이 돈 까밀로란 신부처럼 살았으면 하는 것이란다. 주님과 대화하며 원수를 사랑할 줄 아는 진짜 사랑의 인간. 너도 기도하다 내 생각이 나면 주님께 내가 돈 까밀로와 같은, 아니 비슷한 성격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 주렴. 물론 내 성격 개조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님이지만. 어찌 됐든 간에 이 책이 너에게 재미있고 유익하게 될 줄 믿는다. 이제 헤어져도 연락이 되면 더욱 좋지만 연락이 안 되더라도 신앙생활과 학교생활, 가정생활, 특히 가정생활에서 너희 오빠께 더욱 잘해드려라. 말씀만 들어도 좋은 분 같으니. 그리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여 어디서나 모범생이 될 줄로 믿겠다. 그리고 진정 바란다. 중학교 때의 그 뜨거운 믿음을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계속, 아니 더 뜨겁게 만들기를 바란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너를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리라고 믿는다. 참, 언제나 건강에 유의해라. 안 그렇게 보이는데 꽤 약하더구나. 그러면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며. 

이 책은 재미있게 읽기 바란다. 

Alo-ha!

-oo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알겠지만 내 철자법과 띄어쓰기 수준이 빼뽀네 정도인가 보다. 다 읽고서 재미있으면 이야기해. 이 책의 2집도 있으니까. 난 책 빌려주는 것만큼은 후한 사람이거든. 

‘Alo-ha 좋아한다. 이 미친...... 여자 친구는 무슨!’

읽는 내내 머리에서 스팀이 나는 나에 비해 녀석의 글은 여유 작작 에 그런 나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때처럼 시시한 소리 지껄인다고 어디로 불러 팰 수도 없고... 내가 도대체 어떻게 녀석에게 이런 틈을 주었는지가 의문스러웠다. 문집을 만들 때 너무 방심을 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이성 과도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 허물없이 적에게 흉금을 털어놓은 걸 그제야 후회했지만 그 얄미운 분홍색 편지 봉투는 내가 여전히 빠른 시간 풀어낼 숙제였다. 그 녀석도 미웠지만 녀석의 청을 한마디로 거절할 이유를 생각하지 못하는 나 자신은 더욱 미웠다. 녀석은 두 장의 글에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촘촘히 쳐 놓은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파진 나는 결국 나 자신과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녀석의 말대로 -너무 이른 거 같아-라고 거절하자.’라고 하면 나의 명분 충실 뇌가 이렇게 물었다. 

‘뭐가 이르지? 녀석은 너를 여자로 보고 청한 글이 아니잖아. 그럼 저 글을 녀석이 여자 친구 해 달라고 해석하는 꼴 이잖아? 녀석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닌데 네가 그러면 녀석이 널 이상하게 여길 거야.’

‘그럼 그냥 싫다고 하자’

내 이성이 아우성쳤다. 

‘갑자기 머리가 비었냐? 이유 없으면 꿀리는 거야. 조목조목 이유를 대라고.’

‘아-그러니까. 그 이유가 지금 없잖아. 녀석은 그냥 친구 하자고 하고 친구는 사귈 시기가 따로 없는 거잖아!’

‘이성 친구는 사귈 시기가 있는 거잖아?’

‘성별이 다르지만 이성이 아니니까 그렇지! 아니, 이성일 수 없으니까 그렇지! 그저 생각이 비슷한 것뿐이니까. ’

‘그냥 너희들도 어쩔 수 없는 여성과 남성이라고 하고 거절해.’

‘그럼 지금까지 녀석과 얘기할 때 여자로서 말한 거라고 인정하는 꼴 이잖아! 사상이 비슷해서 한 것뿐인데.’

‘그럼 그냥 이성 친구 하든가!’

‘이런 망할!?’

이런 대화가 머릿속을 웅웅 댔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나는 녀석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내 신념에 더 맞는다고 결론지었다. 

‘녀석의 말대로 우린 친구지만 우린 분명 성별이 다르니 우린 성별만 다른 친구가 되는 거겠지. 이성 친구가 아니고 말이야. 성별이란 참 거추장스럽군. 왜 주님은 우리를 단성으로 만들지 않으신 걸까? 아-. 녀석이 여자가 되든지 내가 남자가 되면 좋을 텐데……부모님은 어쩌나? 난 상관없지만 우리 꼴이 남자고 여자니 그래도 친한 친구가 될 거라고 말씀은 드려야겠지? 다른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야겠지? 친하게 지내도 이상하게 보지 말라고? 그래서 녀석과 나는 앞으로 뭘 하는 거지?’

결국 나는 이 모든 질문을 무려 여덟 장에 걸쳐 편지에 써 댔다. 그리고 성경공부 모임에서 늘 있었던 아침 기도가 끝날 무렵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녀석이 쓴 것보다 내가 쓴 페이지 수가 많아서 자존심이 상해서 녀석의 면전에 집어던졌다.

"이게 답이다. 얼마나 빨리 읽는지 보자" 

녀석은 우리 둘 다 엄청 지니고 있는 능청으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받아 들고 총알같이 읽더니 시계를 확인하고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빨리 읽어야 되는데?”

“그냥 그러라고!”

녀석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곧장 편지를 읽어 내려가더니 이내 다시 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들었다. 

“3분 걸린다. 그런데 대답은 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친구 하나 사귀는데 이렇게 복잡 한가?" 

나는 녀석이 밤새 한 나의 고민을 너무 간단히 여기는 것 같이 벌컥 화를 내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럼 쉬울 줄 알았어! 이게? 그러게 왜 시작을 해 하길!" 

하지만 새삼 녀석의 단순하고도 거침없는 사고에 당황했었다...... 그리고 아주아주 어쩌면 졸업과 함께 나와의 전쟁을 간단히 끝내지 않은 녀석의 제안을 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녀석과의 진정한 우정의 출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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