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2
<전화 2>
녀석과 전화로 우정을 발전시킨 일 년쯤부터 인가 우리의 긴 대화 끝에 공중전화에 넣을 동전이 다 떨어져 갈 때 즈음이면 녀석은 종종 딴 길로 샐 기회를 엿보는 짓을 시도했다.
“야, 나 이렇게 오래 누구랑 대화하는 거 네가 처음……”
이상한 낌새를 챈 내가 잽싸게 막아섰다.
“야, 난 언제나 누구와도 이 정도는 떠들어.”
“그렇구나. 넌 그럴 거야.”
녀석이 결국 뜸 들이다 결심한 듯 말한다.
“야.”
“왜.”
“나 말이지 네가 참 좋다.”
‘헉, 이 미친놈이 아주 그냥!’
난 당황하지만 그럴수록 목소리를 다잡으며 무덤덤히 말한다.
“그래.”
녀석이 실망이 전화선 너머로 들려온다.
“무슨 답이 그러냐?”
“답 이라니? 질문이 있었나?”
“너도 알겠지만 나 이런 얘기 누구와도 처음 해 보거든.”
“친구가 좋다는 얘기? 왜? 네 친구들이 들으면 섭섭할라.”
“넌 안 그러냐?”
“나야 OO랑은 더 하지.”
“그렇구나. 난 사람이 좋은 건 네가 처음이야. 이상하지?”
“그깟 얘기 좀 길게 한다고 그 감격을 하다니 좀 미친놈 같기도 하고.”
“내가 그런가?”
“정신을 좀 차리는 게 어떨까? 너에게도 훌륭한 이성이란 게 있는 것으로 안다만. 내가 아는 너는 그 따위 정신 나간 말을 막 내뱉는 녀석이 절대 아니거든. 요즘 계약을 자주 잊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냐?”
“내 알던 너답지 않으니.”
“왜? 난 좋은데?”
“헛소리 할 거면 그만 끊고.”
녀석이 다급한 듯 소리친다.
“야. 나 너 많이 좋다고.”
“아-헛소리 할 거면 그만 끊어. 오백 원어치가 왜 이리 길어?”
“오백 원 지금 몇 번째 넣었는데. 곰탱이.”
“그러니까 그만 끊어.”
“다음 주에 이 시간에 또 전화받아라.”
“그래.”
“하지 말라고는 안 하네?”
“그럼 하지 말던지.”
“아냐, 아냐.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교회 갔다 와서 바로 할 거야. 어디 나가지 마.”
“내 맘이다. 끊어라. 철컥.”
녀석은 내가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항상 전화한다고 했고 나는 언제나 그즈음 녀석이 전화를 할 것만 같아 약속이 없이도 우린 그 시간대엔 전화기 옆에 있었다. 나는 집에서 전화를 받았지만 녀석은 우리 집 근처까지 와서 공중전화로 전화했다. 혹시 내가 밖에 나와 있는지 더러 보고 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혹시 담 사이로 서로 보게 되어도 아무도 없는 집에 녀석을 들이지 않았다. 몇 시간을 문 밖에서 서서 이야기하다가 어른들이 오시면 헤어졌다. 보다 못한 외사촌 언니가 들어와서 얘기하라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없이는 나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녀석과의 대화 시간은 이상하게 언제나 짧았다.
[아라사 시계]
아라사 시계가 하나 있소.
만약 시간이 이 시계 대로 따라간다면
내가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 괴로운 시간에
태엽을 빡빡하게 감고 있겠소.
혹시 아오.
시간이 빨리빨리 흘러갈지.
그러나,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엔
이놈의 태엽을 끊어 놓겠소.
혹시 아오.
시간이 멈출런지.
또깍 또깍
이 엉터리 아라사 시계가 보통 시계와 같다는 것이
나의 고민 이라오.
-1991.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