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임
<길들임>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면 그 괴물에 가까운 엄청난 말괄량이를 한술 더 뜨는 한량이 순한 양으로 만든다. 남자 주인공은 사실 처음부터 상대의 엄청난 지참금에 군침이 돌아 시작한 일이지만 하여튼 그는 말괄량이를 다루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예 말괄량이 보다 무엇에든 한 술 더 뜨는 거다. 더 더럽고 더 게걸스럽고 더 포악스럽고……한데 수법은 다르지만 녀석도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녀석은 무엇에나 나와 비슷하면서도 항상 나보다도 더 했다. 그러니 우리는 처음부터 판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처럼 지고 싶지 않았다. 사사건건 녀석과 대섰고 기를 쓰고 덤벼 댔다. 녀석이 대단해 보일수록 나는 더욱 남자스럽게 살고자 했다. 그런 내 사고방식은 외모와 표정, 언어와 복장에 그대로 나타났다. 푸른색과 흰색 회색 위주의 셔츠와 바지, 늘 짧은 머리, 빠른 걸음걸이, 남자를 제압하는 거친 말투, 털털한 몸짓과 거의 없는 미소……게다가 우린 누가 봐도 정확히 역할이 바뀐 친구들이었다. 도서관 휴게실에 가서도 의자가 없으면 내가 가져다가 녀석에게 앉으라 했고 의자에 앉을 때도 녀석은 단정히 앉았고 나는 한쪽 다리를 의자에 걸치고 깡패같이 앉았다. 건물에 들어갈 때 문도 내가 열었다. 어쩌다가 녀석이 열어 주고 기다리면 나는 무척 당황해했다. 녀석이 그런 나에게 여자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녀석이 나를 여자로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우연히 나고 내가 여자니까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더욱 남자 같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그게 아니질 않은가! 녀석은 누구보다도 내가 여자답게 사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하지만 절대로 나를 미는 법이 없었다. 그저 어쩌다가 한 번씩
"야, 평생에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 미장원 가서 머리 하는 거 봤으면 좋겠다."
"교복 갈아입고 나올 시간 없으면 그냥 오지. 치마 입어도 괜찮구만……"
이런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어쩌다 녀석이 정신없이
"넌 머리 묶는 게 제일 예...... 아니 괜찮아 보여"
라고 해서 나를 당황시키면 나는 이튿날 당장 머리를 잘라 버려 녀석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엔 아주 밀어 버리면 어떨까?"하고 으름장을 놓아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쐐기를 박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녀석이 나를 여자로 보는 것은 곧 나를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압박감 때문이었는데 녀석은 그런 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런 나를 그냥 받아 주었다. 어쩌다 말을 하더라도 그냥 물어보듯이 지나갔다. 우리가 자아를 심하게 헷갈려 아무 이야기나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을 때 녀석은 물었다.
“오늘 ‘코스비 가족’ 봤어?”
“아니. 재밌었어?”
“네가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싶어서.”
“왜?”
“그 아저씨 딸이 가슴 커지게 하려고 온갖 약이랑 기계 동원해서 엉뚱한 노력 하는 이야기였거든.”
“미친. 그런 걸 왜 해? 안 보길 잘 했구만.”
“너만 안 그렇지 다른 여자애들은 다 그러고 싶을 걸?”
“아흐 징그러~”
“뭐가. 없으면 모를까 있으려면 제대로 생기는 게 낫지.”
“이 속이 시커먼 놈. 너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구나?”
“아냐. 난 아니지. 다른 애들은 그런다고. 넌 그런 거 관심도 없는 거 알아.”
“당연하지. 옛날에 100미터 달리기 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뛰고 우리 반 애들 거 기록했잖아. 앞에서 보면 여자 애들이 막 가슴이 흔들리고 아주 민망해 죽는다. 난 제일 먼저 뛰어서 다행이지. 내가 그 꼴이면 아주 죽고 싶었을 거야.”
“제일 먼저 뛰었어도 체육 선생님은 보셨겠네?”
“그것도 다 해결해 놨지.”
“어떻게?”
“천을 칭칭 감고 최대한 천천히 몸을 숙이고 뛴다.”
“아-어쩐지...... 그러다 아주 없어지면 어떡하냐?”
“뭘 어떻게? 바라던 바지. 흔적 기관이라고 배웠잖냐? 낄낄낄. 필요도 없는 건 없어져야 돼.”
“그게 좋냐? 다른 여자애들은 못 키워서 안달인데?”
“다 미쳐서들 그래. 지 새끼 젖도 안 먹여 키울 것들이 무슨.”
“99퍼센트의 여자들이 그렇다면 안 그런 네가 비정상이 아닐까?”
“상관없어. 징그러운 건 질색이야.”
“그거 계속할 거냐?”
“필요하다면.”
“아직 크는 몸인데 폐라도 쪼그라지면 어떡하냐. 나이 들어 숨도 못 쉴라. 너는 안 해도 다른 애들처럼 창피하게 되진 않을 거야.”
“그럴까? 에이. 그러게 남자로 태어났음 좀 편해?”
“남자도 나름 불편하고 징그런 부분이 있거든?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네가 알면 무척 실망할 거야.”
“우리 사촌 동생들 다 내가 키웠다. 남자가 뭐가 징그러워? 가슴이 평평 하니 얼마나 심플해? 면도는 또 얼마나 재밌겠어? 날마다 쓱쓱 사악사악...”
“그게 부럽냐? 무지 귀찮거든? 그래서 네 가슴이 나 같으면 좋겠냐?”
“그럼!”
“그 천 만날 하냐? 혹시 지금도?”
“아니. 체육 시간만. 많이 뛸 일 있으면 하고 나올지도 모르고.”
녀석이 정색을 했다.
“우린 절대 뛸 일이 없어. 우리가 걷는 게 남들 뛰는 건데 뭐.”
“응.”
“그 망할 놈의 천 쪼가리를 어디다 놨냐?”
“옷장에 깊숙이 ㅋㅋㅋ.”
“내가 보기만 하면 아주 없애버린다.”
“그럼 우리 집에 못 온다!”
“어이구~”
“속물.”
“아니라니까. 난 네 내장이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고맙다. 친구의 취향이 특이해서 내 폐장까지 잘 생겨야겠구나.”
“‘잘 생기게’가 아니라 ‘건강하게’!.”
“흥. 속보여.”
“정말이야. 네가 아프면 다 무슨 소용이야. 가슴에 관한 모든 토론 취소. 대신 천은 이제 그만하기다. 여름에 숨 못 쉬어서 큰일 나면 어떡하냐?”
“전엔 체육 시간엔 한 번 정말 숨 막혀 죽을 뻔했다. ㅋㅋ.”
“거봐! 웃음이 나오냐? 그래서 어떻게 했어?”
“끙-하고 심호흡했더니 옷핀이 탁 풀러 졌어.”
녀석은 대견 해하며 웃었다.
“잘했어. 힘센 게 이럴 땐 좋군.”
“근데 우리 지금 무슨 얘기 한 거지? 이상한 얘기가 아닌가?”
“이상한 거 아냐. 주님께서 주신 신체에 관한 서로의 관점들을 정리해 본 거지.”
“그런가?”
“그럼, 그럼. 어, 버스 왔다. 뛰-아니, 빨리 걷자!”
이제 나이가 들어 주워들은 것이 많아져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보니 녀석에게 많이 미안하다. 내가 꾸미지 않는다고 해서 망신스러워한 적도 없고 여자답지 않게 군다고 해서 짜증을 낸 적도 없다. 오히려 언제나 나와 동네방네 얼굴 도장을 찍고 다니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이 지한테 시집오게 될 거라고......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위해 항상 최선을 다 한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 가졌던 긴장감은 차츰 편안함으로 종래에는 감사로 다가왔다. 그래도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여전히 여자로서 창피해서 머리핀 한 개를 길가에서 고르지도 못했고 미장원에 가서 나에게 맞는 헤어스타일을 고르는 것도 쑥스러웠다. 그런 것은 다 아버지 말씀처럼 뇌가 없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리라……옷은 그나마 학생 신분에 맞는 것으로 최대한 단정한 것으로 고를 수 있다는 명분 덕에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골랐던 품목이다. 녀석이 나를 완전한 숙녀로 바꿔 놓기 전에 우린 헤어졌지만 그래도 그 발판은 녀석이 깔아 주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거의 발목까지 오나마 치마를 입고 그다지 잘하지는 못해도 “화장” 이란 걸 매일 하게 된 건 녀석의 오랜 길들임의 성과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