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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09. 2023

하얀패모 이야기 20-닮아감

닮아감

<닮아감>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녀석과 내가 서로 닮은 부분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걸을 때 뒷짐을 지거나 혼자 앞으로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편했는데 녀석도 그랬다. 녀석은 정말로 한쪽 귀가 둔해서, 나는 멀쩡한 두 귀가 희한하게도 남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우린 어쩔 수 없는 사오정이었다. 우린 수다를 무척 좋아했다. 어떤 날은 하도 많이 떠들어서 둘 다 목이 잠겨 꺽꺽거려야 했다. 우린 둘 다 무지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걷다 보면 우린 어느새 친구들보다 앞서 걷고 있었다. 우린 맘만 먹으면 교실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친구들의 묘사처럼 ‘공기에 스미도록’ 말할 수 있었다. 자타공인 성량 조절의 귀재들로 우리가 조용하고 빠르게 대화하면 남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우린 그렇게 원래부터 닮아 있던 건지, 아님 시간이 지나면서 닮아진 것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했지만 빠른 속도로 서로의 자아가 합쳐짐을 느낄 수 있었다. 방학 때는 집에서 자는 시간만 빼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도서관에서였지만. 집과 도서관 사이의 먼 길도 우리가 함께 지낸 긴 시간 중 일부다. 만나면 수다를 떠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걸으며 먹으며 쉬며 공부하며 우린 계속 떠들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났을 무렵에도 우린 여전히 만나면 자연스레 둘 사이에 우리의 가방을 놓고 앉으며 우정도 아닌 사랑도 아닌 그 어정쩡한 관계를 잘 유지하며 수다에 집중했다. 녀석의 충만한 지성은 도무지 바닥이 나질 않았고 나의 입심도 여전히 쏟아낼 말들로 가득했다. 선생님들을 비롯한 웬만한 아이들은 우리를 커플로 알고 있었지만 우린, 아니, 적어도 나는 녀석을 사상적 동지로 믿으며 한 인간으로 녀석을 아꼈다. 


고1 겨울 방학 무렵엔가 공부하러 녀석의 집으로 가는 길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장난기가 발동한 녀석은 어느 집 담벼락에 쌓인 눈을 조심스레 그대로 두 손에 떠서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에 지그시 눌렀다 조심스레 떼어내서 잠시 살펴보더니 제 얼굴에도 대어 보았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에도 나는 그저 녀석을 한 번 힐끗 보고 걷기를 계속했다. 뭐냐고 묻지도 않았고 머리칼에 남은 묻은 눈을 털어 내지도 않았다. 그저 ‘뭐야?’라는 눈빛으로 녀석을 잠깐 바라보고 계속 걸었다. 

“뭔 짓인지 안 물어?”
 “데쓰 마스크?”

“죽은 거 아니니까 즉석 마스크지. 내 얼굴에도 맞나 봤지.”

“그래 어디 맞디?”

“어. 꼭 맞던데?”

“뻥.”

녀석은 순간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래서 네가 좋단 말이야. 다른 여자 얘들 같으면 이 상황에서 소리 지르고 찡찡대고 눈이 차갑네 어쩌네 하면서 털고 난리를 칠 텐데 넌 참~.”

그러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듯 물었다.

“근데 웬일로 안 때려?”

“왜?”

“내가 네 얼굴에 내 얼굴 댔잖아? 이것도 일종의 신체 접촉이잖아?”

“접촉을 했어야 때리지.”

“분명했거든?”

“그렇게 못 했을 걸?”

“했다니까 내가?”

“ㅋㅋ. 내 마스크에 네 얼굴 못 들어가지. 특히 너는 코부터 걸릴 거거든.”

내가 킬킬거리자 녀석이 내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말했다. 

“요거 가끔 내가 아닌지 요즘 헷갈려~ 근데 너 무슨 생각하기는 했지?”

“응. 텔레비전에서 본 데스마스크 만드는 방법.”

“그거 꽤 재밌지? 너도 내가 언젠가 해 줄게.”

“그거 죽어야 할 수 있잖아. 유명한 사람들만 하는 거고.”

“죽기는! 살아있을 때 해 놔야지.”

“그걸 뭐에다 쓰냐?”

“피그말리온으로 만들 거다 왜.”

“그게 뭐야?”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 말하면 또 맞을 거야. 암튼 난 요즘 무지 헷갈린다. 네가 자꾸 나 같아서. 왜 그러지? 생김새는 둘이 영 딴 판들인데 말이야.”

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무렵 나도 같은 생각을 했으므로. 녀석은 내가 아닌데 나 자신인 듯했고 내가 마치 녀석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뭐랄까 둘이면서 하나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녀석을 보고 있으면 내가 녀석처럼 보이고 녀석이 나처럼 보였다면 맞을는지. 사 년 내내 우리 둘 사이에 언제나 있던 커다란 가방 두 개도 우리의 영혼이 오가는 것을 막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었나 보다.

“너도 인정한다는 거냐? 우린 정말 닮았지?”

“그래, 생긴 건 완전 반대인데 옆에 있으면 나라고 착각 드는 건 사실이다.”

녀석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이게 대체 뭘까?”

“그냥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뭐.”

“그럴까? 내가 세상에서 다른 누구와 이렇게 닮았다고 착각할 일이 또 있을까?”

“생각이 닮으면 그렇게 되기도 하는가 보다 생각해, 나도.”

“이런 느낌 참 좋지?”

“아 이제 그만 감격해. 빨리 걷자고.”

“그러자.”

녀석도 걸음이 빨라졌다. 우린 또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누군가가 나와 닮았다는 건 왜 좋은 느낌을 주는 건지 서로 생각에 잠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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