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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10. 2023

하얀패모 이야기 19-배려

배려

<배려>

우리 각자의 대외적 이미지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반대로 우리의 만남에 한해 주도권은 항상 녀석에게 있었다. 약속 시간, 장소, 대화 길이, 식사 등등 모두 녀석이 알아서 정했다. 만나자는 것도, 그만 들어가자는 것도, 어딜 가자는 것도, 무얼 보자는 것도 모두 녀석이 알아서 했고 나는 그저 따랐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간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건 나의 약삭빠르고 비겁한 계산이 무의식적으로 깔린 행동이기도 했다. 이미 이성 친구와 공식적으로 만난다는 것부터가 아직 힘든 나는 이 관계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의미에서 최대로 수동적이 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에라, 다 네가 해라. 나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찌 되었든 이 방식은 참 편했다. 녀석을 만난 때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녀석은 나와 만나서 할 것들이 항상 머릿속에 뚜렷이 있어서 내게 어디 가서 무얼 하고 뭘 먹고 싶은지도 묻지 않았다. 모든 계획은 녀석에게 이미 있었고 나는 그냥 그 시간을 느끼고 감탄하면 되었다. 정작 서울서 태어난 건 난데 난 말 그대로 서울 촌놈에 길치였고 지방 출신인 녀석은 서울 구석구석을 모르는 곳이 없었고 취미와 관심사도 참 다양했다. 녀석을 따라다니며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도 많았다. 내 평생 가볼 일이 없을 프랑스 문화원에도 가보고 청계천 고서 길도 걸어 보고 녀석의 취향 때문에 고등학생 주제에 레스토랑에 가서 칼질까지 해야 했다. 녀석이 나와 보내는 시간 중 어려움을 느낄 때는 단 한 가지 경우. 우리가 매일 먹는 분식(어묵, 떡볶이, 튀김, 김밥 이 네 가지)을 매 번 다른 조합으로 질리지 않도록 주문하는 것이다. 주문을 할 때 녀석은 언제나 검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항상 신중을 기했다. 

“오늘도 한번 잘 시켜 봐.”

“매번 하는 일이지만 할 때마다 힘들거든.”

“그래도 신기하게 매 번 잘해 너는.”

“너 때문에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재능을 발견한 것 같다니까?”

“그러게.”

“아주머니, 음... 오늘은 떡볶이랑 김밥을 주세요.”

“오호, 오늘도 훌륭한 조합이야. 새로워~. 왜 내가 하면 이 기분이 안 들까?”

“인마, 이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경우의 수 계산이 좀 돼야지.”


나는 지금도 내 여학생들에게 말해주곤 한다. “우리 뭘 할까?”또는 “우리 뭐 먹을까?”하고 묻는 녀석과는 다시 볼 필요 없다고. 여학생들은 그 이유를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그놈은 너 만나러 나오기 전 네 생각 한 번도 안 한 놈이다.”

그러면 남학생들은 신음하고 여학생들은 무릎을 친다. 어떤 순진한 남학생들은 묻는다.

“선생님, 그런 거 제 맘대로 하면 오히려 여자들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여학생들에게 묻는다. 

“여학생들, 이 말이 맞니? 남자들이 이런 거 물어보면 고마울까?”

“짜증 나요~”

남자와 여자. 요즘 세대도 서로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 관계에서 녀석은 항상 더 많이 생각했고 더 많이 포기했고 무엇이든 나를 배려하는 위주로 행동했다. 녀석이 한 배려 중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 중 한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녀석과 나는 봉사 활동까지 참 많은 것을 함께 했는데 이 모든 것을 하면서도 녀석은 항상 내가 지와 가장 예민한 문제인 경제적인 차이로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까 조심했다. 다음의 대화는 녀석이 음악적 취향까지도 경제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까지도 계산했음을 보여주는 대화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기나 긴 수다가 끝날 무렵 녀석이 물었다. 

“그 드라마(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부잣집 남자가 가난한 여직공과 사랑에 성공한다는 줄거리) 봤어?”

“응.”

“이 자식. 공부 안 했구나?”

“밥 먹을 때 봤다. 지도 봤구만 뭐.”

“얘기가 꽤 재미있게 흘러가잖아.”

“그렇더라고.”

“거기서 두 주인공들이 공연 보는 장면 어땠어?”

“남자는 좋았겠지만 여자는 좀 부담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즐기기보다는 긴장하고 남자 눈치 보고 그랬을 거 같아. 문화생활도 해 본 사람이나 좋은 거지. 그 여자가 뭘 알겠어?”

“자꾸 접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그걸 즐길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니까.”

“그 말도 맞다. 기회 자체가 없어서 모를 수도 있겠지.”

녀석이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거 보고 나도 좋은 거 배웠어. 사람 사이에 좋은 걸 공유하고 싶어도 서로 문화 차이 때문에 상처받지 않게 생각할 게 많구나 하는 거.”

“그럴 수도 있겠지.”

“너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잠이 잘 와.”

“좋은 것도 있는데?”

“난 그냥 잠만 오던데? 그 보단 영화 음악이나 세미클래식이 훨씬 드라마틱하지. 클래식은 그에 비하면 너무... 맹숭맹숭해.”

“나도 그런 건 다 좋지. 클래식도 좋고.”

“몇 곡 괜찮은 것도 있지만 왠지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넌 그게 문제야.”

“뭐가?”

“너랑 안 어울리다니?”

“그렇잖냐. 나랑 그런 간지러운 음악이 어울리냐, 그럼?”

“클래식이 간지러운 음악도 아니지만 너도 그렇게 거친 사람은 아니야.”

“그럼 내가 야들야들한 사람이냐?”

“넌 그냥... 좋은 사람이야. 네 생각만큼 그렇게 거칠지도 않은. 클래식을 듣는 모습도 잘 어울리는.”

“집어치워라. 말만 들어도 근질거려. 난 확실한 게 좋거든. 질질 늘어지는 오페라보단 깔끔한 뮤지컬이 좋고 스토리도 없는 클래식보다는 드라마틱한 영화음악이 좋단 말이지. 게다가...... 클래식은 부르주아적이다.”

“결국 그거지. 클래식 싫어하는 진짜 이유가? 너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냥 별로 와닿지 않는 걸 어째?”

“마음을 열고 들어보지도 않았잖아?”

“그걸 굳이 해야 되냐?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좋아하고 때론 거기서 위안도 받고 하니까 너한테도 알게 해 주고 싶은 거지.”

“네 친구 하기도 쉬운 게 아니야. 온갖 부르주아 짓은 다 해야 되니.”

“나도 알아. 그래도 어차피 친구 해주기로 한 김에 이거……. 들어주면 안 되냐?”

녀석이 주머니에서 포장한 작은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뭐야 이게?”

“페르귄트라는 곡인데......”

“아-. 클래식? 이것 봐. 이름부터 어렵다.”

“이름만 그래. 사실 많이 들어 봤을 거야. 가제트 형사 알지? 거기 삽입곡이거든.”

내가 좋아하는 가제트 형사의 이름을 듣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가제트는 재밌지만......”

“내가 확신하건대 잠이 오진 않을 거야.”

“에그... 난 시끄러운 것도 싫은데.”

“시끄럽지도 않아. 제발 버리지 말고 들어 봐.”
 “버리진 않지.”

“그래야지...... 생일선물인데.”

“엉?”

“생일축하 한다, OO. 생일날 못 보니까 미리 샀어.”

“그렇구나...”

“사놓고 엄청 걱정했다. 퇴짜 맞을까 봐.”

“퇴짜는 무슨.”

“뮤지컬 곡으로 살까도 했는데 그건 너도 많이 들으니까.”

“그냥 주면 되지 무슨 사설이 그렇게 기냐.”

“미안. 내가 워낙 좀 사족이 많은 인간 이잖냐.”

“들어 볼게.”

“좋은 곡이야. 가끔 같이 들었으면 좋겠어.”

“윽-. 이게 끝이길”

“좋아할 거야. 내가 아는 너는.”

“맨날 숙제나 주더니 이젠 음악 숙제까지 주냐?”

“그래. 끝까지 다 듣기. 이게 다음 주까지 숙제다.”

“잠 오면 네가 책임질 거지?”

“그럼 다신 들으라고 안 한다.”

“좋아.”


집에 와서 별 기대하지 않고 플레이시켰던 그 곡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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