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패모 Apr 10. 2023

하얀패모 이야기 18-박사와 바보

박사와 바보

<박사와 바보>

녀석과 친밀해질수록 나는 녀석과 나의 과거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지금의 녀석은 그 재수 없던 우리 반 반장이 아니었다. 녀석은 나에게 항상 정중했고 예의가 발랐다. 친구가 되어 변했다고 하기엔 녀석의 인간성 전부가 전과는 완전 딴판 인지라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에게 먼저 자신이 여학생 혐오증까지 있도록 행동한 이유를 물었다. 

“너는 지내고 보니까 그렇게 여학생들 무시하는 재수는 아닌데 중학교 땐 왜 그렇게 여자들에게 재수 없이 굴었어?”

녀석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침없이 답했다. 

“일단 너고 나고 누구고 간에 성적이 나쁘지 않고 아주 심하게 못생기지만 않으면 실제로 그렇게 잘난 거 아니어도 확률적으로 전교에서 대여섯 명은 쯤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어있거든?”

“몰랐는데 왕자병이 있었구먼.”

“그게 아니라 인간들은 다 그런 거야. 모여 사는 반경 내에서 거의 일이 생기는 거지. 가까이 늘 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좋아지는 거라고. 몰라서 그렇지 너도 추종자가 몇 명 있었어. OOO은 대놓고 너한테 좋아한다고 그러고 다녔잖아. 너한테 그렇게 무시당해도.”

“아 그놈은 미쳐서 그런 거고. 그래서 그놈한테 의자 날렸잖아. 패도 안 되는 놈도 있다니 원. 그래서?”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여학생도 당연히 몇 명은 있다는 얘기지 않겠어? 그런데 내가 그 여학생한테 관심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도 내가 혹시 모르고 친절하게 해 주면 그 애는 100% 착각하게 되어있거든.”

이성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고 그 분야에 대해서는 눈앞의 현상을 보고서도 뭐든지 내가 믿는 대로 믿고 싶었던 나는 발끈했다. 

“여자애들이 그렇게 덜 떨어지지 않았거든? 그런 바보 같은 착각을 쉽게 할 리 없잖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게 여자들의 심리 거든.”

“난 안 그러거든?”

“넌 그냥 아직 여자에 대해 모를 뿐이고.”

“나도 여자 거든?”

“이럴 때만 지가 여자 라지. 아무튼 네가 여자라도 보통 여자들 심리는 내가 더 잘 안다. 그건 인정해라.”

“흥. 그래서?”

“자, 그럼 이제 어떻게? 그 여자애가 착각하도록 놔둘까? 아니지. 그건 그 여자애한테 정말 치사한 짓이거든.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잖아. 차라리 내가 재수 없는 놈이 되고 여자애들이 상처 안 받는 게 낫잖아.”

“그게...... 말은 그럴듯한데 꼭 그 방법 밖엔 없었냐? 아주 역겨워 혼났다 내가. 상처도 될 수 있어.”

“뭐 날 얄밉게 본 건 유감이지만 그래도 여자애들 마음 뻔히 알면서 자기 마음은 안 보여주고 은근히 즐기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건 상대의 마음을 알면서도 이용하는, 같은 남자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더러운 마음이지.”

“정말 더럽구나. 실망이야.”

“풋. 너는 남자들이 의리와 명분에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로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정말 치사한 것들.”

“그러게. 내가 이래서 너랑 수다 떠는 게 좋거든. 역겨워할 걸 역겨워하지. 설명이나 말이 필요 없이.” 

“그래도 왕 재수 없었다, 너. 그리고, 나는 널 분명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왜 날 그렇게 갈궈댔냐? 네 말대로라면 난 분명 희생자네?”

여태껏 뿌듯한 얼굴로 지껄여 대던 녀석이 허를 찔린 듯한 눈빛으로 다급히 말했다. 

“그건 처음엔 네 기를 꺾으려고 그랬던 거지.”

“내가 뭘 어쨌길래?”

“사실 초반부터 임원으로서 내가 밀리는 꼴이었잖아. 표도 적게 나오고. 너는 압도적 지지에서 출발했고 나는 워 그냥 어부지리로...... 게다가 얘들도 내 말보다 네 말 더 잘 듣지. 내가 골이 안 나게 됐냐?”

“그래서 그렇게 태클을 걸어 댔어? 너도 치사한 놈 맞는구먼. 근데 갑자기 그러다 친구 하자고 한 건 뭐야?”

“태클 이라니. 나의 숭고한 연구와 실험들을...... 그냥 너한테 좀 속이 상해서 어떤 인간인가 하고 관찰을 하다가 그냥 너라는 인간에 흥미가 생겼다 고나 할까? ‘이 녀석은 뭔가 재미있는 게 있다’ 싶었지.”

“재밌는 거?”

“뭐가?”

“사실 너에 대한 소문은 많이 알고 있었어. 주로 너의 화려한 전적에 대한 것이었지. 남학생은 물론 날라리들도 너한테는 개기지 못한다는 둥 하는. 그래서 솔직히 처음엔 별로 관심 없었어. 그저 웬 예수 믿는 선머슴아랑 임원 하게 돼서 고달프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지. 내가 1, 2 학년 땐 부반장이 000랑 000였거든.”

“아-. 나도 걔네들 좋긴 해. 착하지. 천상 여자고.”

“그래, 암튼 좀 나도 나름 처음엔 당황스럽고 그랬다. 너란 사람이.” 

“난 네놈에 대해서 당황이란 말이 부족하거든?”

“그래, 좌우지간 미안하고. 너란 아이를 관찰하다가 너도 뭔가 따뜻한 걸 감추거나 있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생각을 했지. 네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면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걸 그렇게 좋아할 리도 없고. 환경미화 때 네가 그 영화 얘기하며 아주 행복해 보였지.” 

“이 자식. 그래서 그날 바로 개겼냐? 면도하고 오라고 겁도 없이?”

“일종의 선전포고였지. 예상대로 침착하게 받아 넘기드만.”

“예상을 했다고?”

“그럼. 내가 누군데 그런 정신 나간 짓을 그냥 했겠냐?”

“너는 그런 것을 ‘생각’ 도 해보는구나. 나는 정말 너란 존재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좀 섭섭하긴 하지만 이해해. 너는 그런 애니까. 사실 네가 그렇게 무관심해서 나는 내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지.”

“연구?”

“그럼. 나는 연구가 좋거든? 삼 학년 새 연구 제목이 ‘너’ 가 된 거지. 사실 이래 봬도 나는 여성학 박사쯤 된다. 그동안 읽은 책이 얼만데.”

“저질. 모범생 샌님인 줄 알았더니.”

“무슨? 지구의 반이 여자들인데 그들에 대해 공부해서 해로울 게 뭐람? 아니지. 난 아주 철저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성교육 따위가 아닌, 진실로 남자와 여자 서로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연구를 말이야. 그럼 이혼율이 훨씬 감소할 거다, 아마. 왜 좋다고 미쳐서 결혼들을 한 다음 또 미친 듯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이혼을 하느냐? 그건 바로 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들을 한 상태로 결혼을 하기 때문인 거야. 안 그래? ”

“글쎄, 어차피 난 독신주의라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할 말이 없고, 그래서 네 그 잘난 연구 결과가 ‘OO’은 갈궈야 된다-로 나왔냐? 어차피 나는 너란 녀석 한텐 관심도 없는데 그냥 잘해주든가.”

“말했잖아. 일단 너 때문에 자존심도 상했었고 무엇보다 넌 내 연구에 따르면 다른 여자애들하고 다르거든. 잘해주면 그 순간부터 난 아마 네게 인간도 아니게 보였을 거니까. 갈구면 맞수정도로는 여겨주더라도. 안 그래도 자존심 상하는데 인간 취급도 못 받으면 쓰냐?”

“너는 그런 게 다 보이냐?”

“나는 그래.”

“이거 아주 무서운 놈이구만.”

“그래. 나는 그런 놈이다. 그러니 내 말을 잘 듣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잖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네가 알다시피 난 아주 단순한 사람이니까 알아서 양심껏 대해주라. 네가 날 이용해도 난 아마 모를 테니까. 널 알면 알수록 내가 아주 단순 무식한 인간이 되는 것 같구나.”

“맞아. 넌 아주 단순해. 그리고 아주 복잡해.”

“에라, 난 모르겠다. 너 잘났다~”

녀석과 이렇게 대화할수록 나는 내가 참으로 좁은 생각의 바보라는 생각을 했다. 이성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으로 ‘생각’ 이란 걸 하면 ‘끼’ 있는 아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던 그 시절, 녀석은 어떻게 이성을 ‘객관적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녀석과 나는 박사학 소지자와 입문자로 여성학이란 생소한 분야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도 시작했다. 


이전 17화 하얀패모 이야기 17-결벽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