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패모 Apr 09. 2023

하얀패모 이야기 27-발렌타인&화이트 데이

<발렌타인 & 화이트 데이>

<발렌타인 & 화이트 데이>

녀석과 주권 쟁탈전으로 티격태격하던 그 이듬해에도 변함없이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도 나도 그런 날들의 이벤트나 선물 따위를 아주 싫어했고 무엇보다 상술에 놀아나는 게 싫어 각종 날들은 우리에겐 거의 경멸 수준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전화로 실없는 소리를 해댄 후로는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자기도 초콜릿을 받고 싶다고 징징대고 화이트 데이 때는 사탕 주면 갖다 버릴 거냐고 묻곤 했다. 

“야, 나도 발렌타인 초콜릿인가 하는 거 먹게 해 주면 안 되겠냐?”

“골 빈 짓이라고 같이 욕할 때는 언제고?”

“평소 먹던 초콜릿을 그날 네가 사 주면 어떻겠나 하는 거지.”

“그냥 네가 사 먹으면 되겠네.”

“그냥 좀 주면 안 되냐?”

나는 하도 지겨워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그냥 초콜릿만 먹으면 되냐? 그날?”

녀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렇지. 꼭 그날.”

“기다려 봐.”

녀석에게 희망을 준 나는 며칠 뒤 오빠 여자 친구가 선물한 초콜릿을 두 개 훔쳐다가 녀석과 하나씩 나눠 먹었다. 

“자. 받아라. 이게 그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이다. 너 분명 먹었으니 앞으로 딴 소리 마라. 게다가 이건 아주 어렵게 구한 거다. ㅋㅋㅋ.” 

의외로 무덤덤하게 받아먹던 녀석이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캐물어왔다. 

“그럼 그렇지. 이 자식, 수상해. 불어. 어디서 났어?”

“어서 먹기나 해. 확 뺏기 전에.”

녀석이 수상한 듯 곁눈질을 하며 부지런히 우물댔다.

“자, 다 먹었다. 어디서 났냐? 네가 이걸 네 손으로 샀을 리는 없고.”

“당연하지. 울 오빠가 받은 거 훔쳐왔다. 아주 특별하지 않냐?”

“참 너답다.”

“야, 아무 거면 어떠냐. 발렌타인데이고 초콜릿 먹으면 되는 거지. 의미가 중요하다고. 게다가 이 정성이 어디냐. 친구를 위해 절도를 서슴지 않다- 정말 위대한 우정 아니냐?”

“오~. 그러니까 그 말은...... 야, 너 그 말 취소 마라. 빨랑 약속해, 지금.”

“뭐!?”

“의미가 중요하다는 말.”

“또 뭔 생각이야?”

“그냥 빨리 해.”

“약속한다.”

“그러니까 그 말은 네가 지금 나한테 준 게 의미상 정말 발렌타인 초콜릿이란 거잖아!”

“그래. 네 놈이 맨날 노래하던 바로 그!”

“오호, 왜 이러시나. 네가 달랜다고 줄 녀석이냐? 그러니까 이 초콜릿의 의미가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이잖냐고?”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먹고자 했던.”

“그러니까! 아! 드디어 네가!”

“그렇게 맛있냐? 한 개 더 훔쳐다 주랴?”

“맛있어서 이러냐?”

“그렇게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다시 토해라.”

“싫어. 절대 못 해.”

“그럼 싱거운 소리 그만해.”

“알았어.”

“네가 그런 멍청한 해석 붙이면 온 동네 남자애들한테 아주 초콜릿 쫙 풀어버린다.”

“에이, 정말”

“못 할 것 같냐?”

“못 할 녀석이면 차라리 걱정도 없지!”

“그러니까~ 왜 사람을 건드려~”

“......”

“야.”

“왜.”

“진짜 발렌타이데이 초콜릿은 나중에 네 색시한테 실컷 받아라.”

“조용해라. 너 두고 보자. 나중엔 한 트럭을 사 줘도 안 받아 줄 거니까.”

“그래그래. 네 맘대로.” 

한 달이 지나 곧 화이트 데이가 되었다. 녀석은 조용했다. 나는 속으로는 좀 의아스럽기도 했고 발렌타인데이 날 내가 너무 했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녀석이 사탕이라도 주면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내심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저녁처럼 도서관 앞에서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녀석은 언제나처럼 다가오더니 아이들이 손가락에 반지처럼 끼고 빨아먹는 보석 사탕과 립스틱 모양으로 생긴 사탕 두 개를 불쑥 내밀며 한 개를 고르라고 했다. 불량식품처럼 보여 내키지 않아 나는 잔소리부터 퍼부어 댔다.

“뭐야?”

“하나 골라라.”

“이런 거 어디서 났어?”

“으응, 그냥 심심해서 뽑기 해봤어.”

“그런 걸 왜 해? 정신 나갔다 쯧쯧……다 큰 것이……”

“알았어, 그냥 오늘만 먹어. 다음엔 하라고 해도 안 해!”

여차하면 강제로 먹일 기세였다. 그걸 전혀 수상하다고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내키지는 않는 손짓으로 한 개를 골라 말없이 걸으며 단번에 우적우적 다 깨어 먹었다. 달빛 아래 걸으며 녀석도 나머지 한 개를 집어 들고 그런 나를 쳐다보며 말없이 제 몫을 해치웠다. 

“참 잘도 먹지.”

“아, 먹으라며!”

“... 맛있냐?”

“... 맛은 무슨!”

“아직 이런 게 있더라. 재밌지?”

“재미는 무슨!”

이렇게 싱겁게 헤어진 다음 날, 녀석은 싱글싱글 웃으며 나에게 불쑥 화이트 데이 이야기를 했다. 

“야, 너 화이트 데이 사탕 누가 주대?”

나는 속으로 별 웃기는 녀석 다 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사상적 동지라고 하고 다녀도 톡 까놓고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으며 우리가 늘 함께 다니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저 말고 나한테 사탕 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도서관에서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 수다 떨다가도 다른 남학생들 슬쩍슬쩍 발로 걷어차고 눈치 줘서 다 내쫓아 버려서 안 그래도 민망해 죽겠는데 어떤 간 큰 녀석이 내게 사탕을 주겠는가 말이다. 

“야, 누가 나한테 그런 걸 주냐?”

“……그런데...... 난 너 사탕 받은 거 안다~.”

‘엉? 난데없이 이게 뭔 소리?’

‘헛소동’의 베아트리스에게 동정받을 억울할 일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안 받은 사탕을 네가 어떻게 알아?!”

녀석이 빙긋 웃었다. 

“정말 안 먹었냐?”

“당연하지!”

“줄 놈도 없거니와 줘도 그딴 쓸데없는 장단에 놀아날 내가 아니다.” 

“진짜?”

“이 놈이 왜 이래? 왜? 누가 봤다든?”

“어제……그거……너 그게 화이트 데이 사탕인 거 진짜 모르고 먹었냐? 어쩜 그렇게 둔하냐 너는? 흐흐흐, 아주 잘 먹드만. 암튼 넌 내가 준 사탕 받은 거야. 이젠 넌 딴 데 시집 못 간다~~”

“이 미친!”

“토하지도 못하겠지? 어제 먹었으니까~?”

“이 무식한 것아. 그건 효력이 없는 거야.”

“어째서?”

“싸구려 불량 식품 사탕 이잖아!”

“비싼 거면 지가 먹나?”

“미쳤냐!.”

“거봐.”

“사기꾼.”

“너한테 배웠다.”

“뭐?”

“네 초콜릿도 사기성이 농후했지.”

“흥. 그래 둘 다 사기 친 거니까 무효다.”

“무슨. 내가 얼마나 머릴 써서 먹인 사탕인데. 다른 남자애들은 그냥 돈만 쓰면 되는데 나는 매사 왜 이렇게 어려운지.......”

“시끄러워. 애들한테 입만 뻥끗해봐라. 그날로 절교다.”

“......”

집에 가면서 녀석은 한숨을 쉬었다. 

“야, 난 여자 친구한테 선물도 맘대로 못 주냐? 조금 풀어주라.”

“조용해! 이 사기꾼아! 여자 친구가 아니라 동지라고. 넌 사상이 불순해~”

“아-동지. 젠장. 내가 너한테 그 말을 가르치는 게 아닌데...”

“흥”

윽박은 질렀지만 어찌나 녀석의 하는 짓이 우습던지……내 엄격함 때문에 녀석이 기발해진 건지 아니면 녀석이 웃기는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 동안 이런 일 투성이었다. 그래서 녀석은 내게 글을 썼다. 지금도 내가 가장 아끼는 선물은 편지다. 특히 학생들이 준 마음이 느껴지는 편지는 모두 모아 두었다. 메시지도 모두 저장해 둔다. 불이 나도 가장 먼저 챙길 것들이다. 글은 마음이라 여긴다. 마음은 내가 살면서 받은 가장 값비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하얀패모 이야기 26-협정 위반-일방적 개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