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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09. 2023

하얀패모 이야기 29-스킨십

스킨십

 <스킨십>

잔디가 파릇해지는 봄부터 단풍이 알록달록 물드는 가을까지 우리는 매주 친구들과 근처 넓은 공원에서 만났다. 거기서 학교 얘기며 교회 이야기로 수다도 떨고 문제집도 풀었다. 가끔 다른 친구들이 사정이 생겨 못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녀석과 나는 거의 거르지 않고 공원에서 숙제를 해결했다. 탁 트인 공원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무한한 정서적 안정을 주었다. 우리가 잔디밭에서 수학이나 영어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릴 어색하게 쳐다보고 지나가던 게 생각난다. 고등학생들이 커다란 가방 두 개를 사이에 놓고 공원에서 문제집을 푸는 모습은 확실히 흔한 광경을 아니었던 것 같다. 

‘제넨 뭐야? 이런 데서 무슨 공부야?’하는 표정으로. 공원은 도서관만큼 공부하기가 편하진 않았지만 맑은 공기와 한없이 느긋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마음을 끌었다. 그런데 녀석은 가끔 너무 느긋해지는지 헛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즉 멀쩡히 문제집을 풀던 녀석이 느닷없이 묻는 거다. 

“야.”

“왜?”

“손 잡아 봐도 돼?”

나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놀란 표현도 못하고 녀석에게 물었다. 

“악수는 왜 갑자기?”

“에이. 무슨 악수. 내가 미쳤냐? 문제 풀다 악수하자고 하게?” 

“그럼 손은 왜? “

“그냥. 느낌이 좋을 거 같아서.”

“그냥이 어디 있냐. 난 모든 것에 이유가 있어야 돼. 손을 잡을 땐 어디 험한 산을 혼자 못 오른다든가 뭐 그렇게 도와줄 때 필요하지 멀쩡히 앉아서 왜 손을 잡냐? 내가 체머리 흔들며 방향을 못 잡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끼리도 그냥 손 잡잖아. 넌 나랑 친구라며? 근데 왜 나랑은 손 안 잡냐.”

“첫째, 너랑만 안 잡는 게 아니고 여자애들끼리도 손 안 잡아. 둘째 넌 나랑 친구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랑 반대의 성이기 때문이지.”

“너는 논리가 일관성이 없어. 어떨 땐 성을 초월하는 사람같이 굴다가 어떨 땐 극성차별주의자로 돌변하거든.”

“천만에. 쓸데없는 짓은 절대 안 한다는 내 대 원칙을 항상 그리고 지금도 일관되게 지키고 있는 중이야.”

“손이 왜 잡기 싫어?”

“싫은 게 아니고 왜 하는지 모를 뿐이지. 더럽기도 하고.”

“처음 건 그렇다 치고 더럽다니?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다른 놈들이 나더러 화장실도 안 가는 것 같다고 하는데?”

“네가 더럽다는 게 아니라 소설 ’ 젊은 그들‘ 에서 주인공 둘이 손잡고 나면 꼭 땀이 배어 있다고 표현되어 있잖아? 그래서 손 잡으면 땀나면 더러울 것 같아.”

“아~별. 누가 그 딴 소설 읽으랬냐!”

“아무튼 난 별로 잡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리고 손잡는 게 왜 특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나는 녀석의 눈앞에 대고 내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이게 뭐 그렇게 특별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두 피부 조직이 맞닿으면 뭐가 달라?”

“당연 틀리지. 우선 너는 그렇게 네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내 손을 잡는 거고......”

“온도 차는 나겠다. 너는 손이 더워 죽겠고 나는 차서 죽겠으니.”

“사실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온도 때문에 손을 잡진 않아.”

“그럼 왜 팔은 안 잡을까? 팔 하고 손은 뭐가 다를까?”

“우선 손바닥은 다른 피부 조직과 달리 신경 분포가 예민하다고.”

“우리가 지금 예민해지면 좋을 게 뭐냐?”

“누가 예민해지재? 지가 헛소리하니까 나도 말이 헛나갔지.”

“너는 여자 손 잡아봤냐?”

“그럼. 초등학교 운동회 때마다 여자 짝하고 손잡고 춤췄지 그럼. 너는 안 했냐?”

“난 안 했지. 내 짝이 멋모르고 선생님이 하란대로 내 손잡았다가 나한테 죽도록 맞았어.”

“이거 쬐금할 때부터 악질 이었구만.” 

“창피해서 그랬긴 했지만 사실 별 느낌은 없던 것 같은데?”

“그렇다니까. 그게 뭐 별거냐고.”

“그럼 한 번 잡아 봐.”

“정말?”

녀석은 긴가 민가 내 눈치를 살피며 제 코앞에 쑥 내민 나의 손 위에 얼른 제 손을 잠시 포개었다가 다시 눈치를 살피며 힘을 주어 잡았다. 

“잡았다.”

녀석이 물었다. 

“어때?”

내가 다시 물었다. 

“뭐가 틀려?”

“응, 틀려.”

“뭐가?”

“그냥 좋아. 따뜻하잖아.”

“신경이 마비됐냐? 내 손은 지금 엄청 찬데?”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내 이럴 줄 알았어. 아무렇지도 않구만. 별거 아니네. 악수랑 똑같은데?”

“그렇지? 그러니까 계속 이러고 있자.”

“별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이러고 있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응. 땀나면 더러워질까 걱정만 되는데? 그만 치워.”

“그냥 좀 더 있지? 야, 우린 손도 못 잡나?”

“물론 잡을 수 있어. 누구든 먼저 죽으면 잘 가라고 악수는 하자.”

“그럼 나는 네가 먼저 죽어야 손잡아보겠네?”

“치사한 놈. 말이라도 지가 먼저 죽는다고 하지.” 

“그냥 확 잡고 내가 먼저 죽는다. 됐냐?”

“그럼 확실히 죽기는 하겠네. 내 손에.”

“어휴, 이걸 그냥!”

“시끄러! 너 손 땀나나 봐. 이제 그만 치워.”

“주님의 창조의 유일하신 실수. 이 주책없이 많은 땀샘들!”
 “시꺼. 땀샘 없애고 손바닥 좍좍 갈라질래?”

“남이야 갈라지든지 말든지!”

정말 손잡는 자체는 별 느낌이 없었다. 녀석의 손이 차가왔는지 따뜻했는지도 기억나질 않는다. 아니, 따뜻했을 거다. 지 마음처럼.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없었다. 무지 떨려서. 그 떨림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감추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여 다행이었다. 녀석의 손이 가볍게 떨고 있었다. 

녀석은 공원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아니, 공부 전엔 꼭 잠을 먼저 잤다. 

“나 십 분만 자게 있다가 깨워주라.”

“알았어.”

십 분 후 녀석을 깨웠다. 

“야, 일어나. 십 분 지났어.”

“......”

“야, 안 일어나? 아주 자는 거야?”

“응.”

“장난 말고 빨랑 일어나.”

녀석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배짱을 부렸다. 

“풋. 난 마법에 걸렸다. 뽀뽀해주면 깨어난다.”

뽀뽀라니 세상에. 난 녀석의 대담함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했다. 

“그래? 누가 너한테 그런 망할 걸 걸었냐? 잡히면 내가 죽여준다. 그리고 마법 풀이는 내가 전문이지!”

나는 묵직한 가방을 녀석의 얼굴에 그대로 낙하했다. 

“퍽!”

녀석의 꿈꾸는 듯 한 미소는 금세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윽! 항복!”

“어때? 나 주문 잘 풀지?”

“됐어. 기대하지도 않았다 뭐.”

느리게 반응한다는 나의 특성상 그 순간은 그렇게 대충 넘어갔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와 혼자 생각할 수 있게 된 나는 그 충격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기에다가도 썼다보다. 


[난 어제 녀석이 일어나기 전에 동화처럼 뽀뽀해달란 말에 무척 쇼크를 받았다. 녀석의 호르몬 상태를 고려할 때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그렇게 솔직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의 냉철함은 부모님껜 안심을 내겐 만족을 준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정신적으로 무척 시달렸고 별의별 상상과 피할 궁리를 했고 심지어 다른 친구와 녀석을 이어 보는 상상도 했다. 왜 녀석은 나 같은 선머슴아를 바라보는지 녀석이 측은하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이 다른 여학생과 친구가 되면 우리는 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누군가 나보다 녀석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비겁한 것일까? 이런 고민조차 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녀석과 그냥 친구이고 싶다. 내가 녀석의 유일한 사람이 되면 나는 녀석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을 바랄 수 없다. 내가 녀석의 최고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런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면 이미 그건 순수한 우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91.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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