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패모 Apr 09. 2023

하얀 패모 이야기 32-드러낸 침략 야욕

드러낸 침략 야욕

<드러낸 침략 야욕>

녀석의 개헌 선언 이후로도 우린 여전히 전처럼 수다를 떨고 함께 돌아다녔다. 대부분 모임 친구들도 함께 있었지만 또 많은 시간 더 남아서 더 많은 토론을 해댔다. 열띤 토론의 막바지쯤 녀석은 언제나 나의 개헌 선언을 촉구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집요하게 설득당하여 잠시나마 그 자리를 피하고픈 고종 황제님의 마음으로 나는 어느 날 녀석이 또 시작을 하자 화제를 전환하기도 할 겸 내심 녀석이 개헌 선언 때 했던 그 ‘처음부터’란 말을 따지고 들었다. 

“너 전에 개헌 선포 하던 날 말이야.”

“어 그 역사적인 날? 그날 왜?”

“분명 처음부터 라고 했던 것 같거든. 그 말은 너는 나한테 처음부터 이성 친구가 될 계산도 했었다는 건가?”

녀석은 또 역시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흠.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뭐?”

“언젠가 너한테 지난 얘기를 해 줄 날이 올 거라 생각했었지. 좀 긴 얘기니까 잘 들어라. 이게 즉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거든.”

내 계획에 말려든 녀석은 개헌 선언 촉구는 잠시 접어 두고 지난날을 회상하 듯 팔짱을 낀 한쪽 손을 들어 턱을 고이며 감회 서린 얼굴을 하고는 목소리를 고르더니 말을 시작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처음엔 널 그냥 한 흥미로운 인간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선 남학생들과 협력망을 구축했지. 다들 너에게 꼼짝 못 하는 터라 모두 대 찬성이었어. 이름하여 ‘OO 기 꺾기 프로젝트’가 가동된 거지.” 

“그럼 다른 놈들도 너를 도왔다고?”

“그럼. 하지만 모두는 아니었어. 너도 알다시피 너는 이미 공식 추종자가 있었으니까 그놈 라인은 안 건드렸고. 나머지는 거의 나를 도왔지. 암튼 그러다가 너란 인간에게 독특한 매력이랄까-미안. 너는 이런 말 안 좋아하는데 지금 머리가 안 돈다. - 뭐 그런 게 느껴졌지.”

“뭐 매력? 이 징그러운 놈.”

“저렇다니까. 나도 즐겨 쓰진 않지만 나름 좋은 말인데. 암튼 너는 날 굉장히 싫어했고 녀석들도 내가 네 기를 꺾을 날만 기다렸지만 뭐 녀석들도 눈치챘지. 내가 막판엔 친구 이상의 관심을 가지게 된 걸.”

“그래서 애들이 가끔 이상한 소리 한 건가? 내가 결석하면 걱정하는 놈이 있다는 둥?”

“짜식들이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근지러울 때가 있는 거니까 나도 거기까지는 단속을 못했지. 수업 후에는 좀 잔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는 참 모르드만.”

“그게 너라고 머릿속에서 연결이 안 됐지. 당연히 그 정신 나간 놈인 줄 알았지.”

“아. 그 녀석. 걔는 참 대책이 없드만. 같은 남자로서 측은하기까지 했지. 아무튼 그 녀석의 무모한 실험으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었으니까 뭐 결론적으론 고마운 거지.”

“가만. 여기까지 무척 괘씸하고 속은 기분이 든다만 그건 나중에 따지고 아무튼 너는 친구 제안을 하기 전부터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고 그런 생각이 있으면서도 그 녀석이 나한테 바보 같은 짓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는 거네?”

“뭐 그렇지.” 

“내가 그놈하고 사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은 없었지.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으니.”

“어째서? 그놈도 나름 임원도 하고 얼굴도 알려진 놈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놈은 네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서 해대고 있었으니까. 보면서 아주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 널 좋아하면서 어째 널 연구하지는 않는지. 쯧쯧쯧.”

“시끄러. 넌 뭘 잘했다고. 그 따위 연구나 해대는 주제에.”

“내 연구가 어때서?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한 인간을 나처럼 면밀히 연구하기도 쉽지 않다 너. 난 노벨상을 받아야 된다고. 그리고 너무 우릴 비난하지는 마라. 그 과정에서 우리도 좋은 일도 했다.”

“시끄러 이 사기꾼아.”

“들어 봐. 너도 감동할걸? 처음엔 너에 대해 조사하려고 네 뒤를 따랐는데 자율학습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 생각보다 위험하더라고. 9시도 넘었잖아.”

“뭐 미행까지 했냐?”

“굳이 미행이랄 것 까지야...... 너네 집은 학교에서 가깝잖아. 그냥 좀 돌아서 집에 가는 거랄까?”

“잘도 둘러댄다. 초등학교 때 우리 집 따라오던 놈이 어떤 꼴을 당한 줄 알면 그리 못했을 거다.”

“불쌍한 녀석. 짜식들이 연구를 안 해... 암튼 여자애들이 위험해 보이더라고. 그래서 남학생들끼리 몰래 조를 짜서 야자 끝나고 우리 반 여자애들이 집에 들어가는 거 다 보고 귀가했지. OOO는 서로 안 하려고 해서 남자애들이 돌아가면서 했다. 너는 영광스럽게도 이 반장님께서 직접 하셨다. 근데 이 곰탱이 아가씨가 끝까지 모르시더군.”

이 와중에도 녀석의 ‘아가씨’ 란 말에 소름이 돋았다. 

“‘아가씨’ 하지 마. 그리고 난 진짜 눈치도 못 챘어. 그러니까 남학생들이 우리 여학생들의 일종의 보디가드를 했단 말이야? 다른 여학생들도 별 말 없던데.”

“우리가 첩보 수준인 거야, 아님 너네가 둔한 거야?”

“그러게......”

“그래. 우리는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자애들이 정말 너무 한 거지...... 난 정말 체력장 때 너네가 올 줄 알았다.”

“가려고 했었어, 이 멍청아. 네가 속 뒤집어서 다 엎었지만.”

“그랬어? 생각이나 했다니 다행이군.”

녀석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난 등골이 오싹해졌다. ‘

‘내가 혹시 웃기는 짓은 안 했나? 내가 얼마나 잘 넘어져? 저 자식이 그걸 다 봤나?’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오갔다. 녀석이 내 주의를 다시 끌었다. 

“암튼 난 정말 재밌었어. 그래도 마지막에 친구 하자고 편지 쓸 때는 좀 불안했지. 그건 정말 한 판의 도박이었다니까. 넌 이 위대한 여성학 박사님의 예측도 가끔 벗어나니까.”

이때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녀석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피가 흐를지도 몰라. 조선을 먹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아님 어떻게 하는 짓이 그놈들하고 그렇게 닮았겠어?”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내가 을사년 사건까지 흉내 내기 전에 이제 그만 우리의 합병을 받아들이는 게 어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처음부터 위반할 걸 계획하고 하는 협정도 있냐?”

“완전한 위반은 아니지. 고등학생 기간 동안은 협정을 지키기로 계획했었으니까.”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뀐 거냐?”

“그냥. 더 이상 너한테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기 싫으니까.”

“아! 몰라. 머리 아프다. 오늘은 여기까지.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돼서 버겁다.”

“야, 그래도 달라질 건 없지? 우린 또 내일도 이렇게 수다 떨겠지?”

“이 밤이 지나 봐야 알것다!” 

“내일 보자.”

“......”




작가의 이전글 하얀패모 이야기 31-닮음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