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리스트
당신에게 '먹고 싶은 것'과 '맛있어 보이는 것'은 다른 의미인가?
설문조사로 돌리기에는 너무 사소한 질문이지만, 요즘 내(마르)가 가장 꽂혀있는 질문이다.
내가 고등학생일 적에 엄마는 먹는 것을 잘 챙겨주는 것으로 뒷바라지에 열심이셨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 시절 나는 정말 많이, 꾸준히 먹었다. 당시의 먹-스케줄은 이러하다.
일단 엄마는 아침 식사로 압력솥에 갓 지은 밥과 국을 차린 아침밥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등교 준비에 한참인 요 아이 옆에서, 엄마는 찬합을 준비했다. 1층에는 아침 보충 수업 후에 먹을 과일 2종을, 2층에는 오후 시간대 심심한 입을 달래줄 떡이나 고구마 등 달달한 간식을 채운다.
물론 중간중간 곁들일 수 있도록, 녹차나 우롱차도 잘 우려 코끼리 보온병(ZOJIRUSHI)에 준비한다.
놀랍게도 학교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는 급식으로 따로 먹었다.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간식거리가 준비됐다.
그렇지 않으면? 건방과 예민함이 극에 달해있던 나는, 그 핑계로 짜증을 냈다. 대한민국 고3의 권력이란, 그리고 이 일정을 모두 해낸 어머니의 대단함이란..!
그때는 모든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었어서인지, 그렇게도 먹고 싶은 것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것이 넘쳤다. 지나가며 보이는 간판이나 이미지만 봐도 '어, 저거 맛있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 생각을 내가 말로도 뱉어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할 먹거리가 많은데, 다니는 길마다 '맛있겠다'라고 말하는 음식들이 이렇게 많다니, 옆에서 듣던 엄마는 지쳐서 "넌 뭘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니-"하고 가볍게 핀잔을 줬었다. 그 말에 나도 덩달아 어리둥절, "난 그냥 맛있겠다고 한 건데-?"
그렇게 먹던 습관이 고등학생 신분을 마쳤다고, 자연스럽게 끊어질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직도 먹는 것을 좋아한다. 앨리의 말에 의하면, 나는 매우 먹는 것에 진심인 편이라고 한다. 해서 아직도 지나가는 간판이나 음식점을 보며 '저거 맛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막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그렇다. 나로서는 '저 음식은 그 자체로 맛있을 것 같아요.'이지, '지금 저 음식을 먹고 싶어요.'인 것은 아니기에 이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그런 내 옆에는, 위의 엄마가 오버랩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앨리가 있다.
(마르) 배가 불러도, 그 자체로 맛있어 보이는 게 있다 → 맛있어 보이는 것 ≠ 먹고 싶은 것
(앨리) 배가 부르면, 어느 것도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 맛있어 보이는 것 = 먹고 싶은 것
앨리는 내가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는 음식을 당장 먹지는 않더라도, 나의 먹(고 싶은 품목)-리스트에 그 음식 이름을 올린다는 점을 꼬집었다. 머리에 들어온 음식을 머릿속 리스트에 입력해 두었다가, 1-2주 안에 적절한 시점을 봐서 도장 깨기 하듯이 그 음식을 먹고야 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는 1000개의 행을 가진 엑셀 파일과 같아서 입력값이 마르지 않는다고 팩폭 했다.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앨리와 함께 식사할 때, 약 85%의 확률로 내가 메뉴를 정한다. 메뉴 선택에 큰 열의가 없는 앨리의 옆에서, 나는 앨리의 취향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 적절히 다채로운 메뉴를 제시한다. 앨리는 그게 편하다고 한다. 자, 이제 누가 이득이지?
우리는 대화 끝에 각자에게 적용되는 다른 공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먹-리스트를 번영시킬 자유를 얻은 마르와 메뉴 고르는 번거로움을 덜어낸 앨리의 이 환상적인 조합을 음미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