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한 초록
봄이 되면 여기저기 초록이 눈에 걸린다. 푸릇푸릇한 잎들이 하나둘 보이다가, 셋을 뛰어넘어 무럭무럭 열이 된다. 갑작스럽게 짠-하고 피어나는 산수유, 개나리, 목련은 보는 이에게 서프라이즈(p)를 선사한다. 그리고 덩달아 사람 마음도 들썩들썩하게 된다. 그래서 마르(나)는 벌써 몇 년째 봄이 되면, 꽃이나 식물을 파는 노상이나 온라인 몰을 기웃거린다. 앨리와 함께 '자취방'이 아닌 '자취집'을 꾸리게 되면서부터였다. 다음 이사를 생각해 집에 꼭 필요한 것들만 들이던 '방' 신세를 벗어나자마자, 생활필수품이 아닌 품목들도 구매 가능 리스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식물은 늘 그 리스트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매해 식물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첫 해에는 그저 내 눈에 예쁜 식물, 즉 대부분 활짝 만개한 꽃을 주로 들였다. 그 해 꽃 화분이 2주 만에, 1달 만에 죽어버리는 것을 반면교사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해에는 '생육 난이도 하', '초보자도 키우기 쉬운 식물'과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 정말 죽이기 어렵다는 식물을 몇 개 들였다. 이때 들어온 아이들은 확실히 대부분 생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쭉쭉 큰다는 많은 리뷰들과 달리 현상 유지에 머무르고 있다. 처음 어린 몬스테라의 잎 한쪽이 갈라지자 '우리 집에도 진짜 몬스테라 있다!'며 감탄했지만, 그 후로 어떤 갈라진 잎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렵다는 혹은 쉽다는 식물도 모두 조언들 같지는 않으니, 이듬해에는 난이도는 조금 내려놓고 충동구매에 맛을 들였다. 다이소에 다녀가다 보이는 식물도 가벼운 마음으로 데려왔는데, 이 친구는 집에서 가장 쑥쑥 자라는 친구가 되었다.
마르는 가드닝에 재능이 없다. 꾸준히 무언가를 가꾸어내는 대부분의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앨리가 필요하다. 앨리는 꽤 정기적으로 식물들을 둘러보며 물을 주고 식물 생장용 램프를 쬐게 해 준다. 짱구가 흰둥이를 데려왔지만, 결국 봉미선 씨의 케어가 필요하게 된 것과 같다. 장난을 섞어 나는 마음에 드는 초록둥이를 구매하면서 앨리에게 "잘 키워줘야 해!"하고 적반하장의 멘트를 던지기도 한다.
여러 차례의 오고 감 끝에 집에는 현재 크고 작은 여덟 아이가 있다. 함께하게 된 시기도 크기도 모두 다르지만, 이들에겐 비슷한 점이 하나 있다. 겨우내 "얼음-!"을 유지하고 있다가 기온이 슬쩍 올라가면 말린 연둣빛 잎을 삐죽 달고 보여준다는 것이다. 초보 집사들 품에서 눈에 띄게 자라지는 않지만, 잠자코 애를 써 쌀알만 한 잎을 영차영차 올려낸다. 기대 없이 물을 주다가 한 번씩 그런 광경을 발견하면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장할 수가 없다. 저 말린 잎이 펴지면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될지, 어린 이파리처럼 크고 짙은 빛을 낼 수 있을지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차오른다.
그러다 알았다, 그동안 내가 길에서 마주해 왔던 갑작스러운 개화는 사실 나에게만 서프라이즈였다는 걸.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을 정도로 숨죽여, 모든 잎과 꽃들이 그들만의 카운트를 세어왔을 것이다. 어떤 일에도 하나-둘-열은 없다. 그저 나 같은 사람이 셋부터 아홉까지에 관심이 없었을 뿐. 물론 모든 것이 열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발견한 작은 잎들의 절반은 자라다 말고 빛깔을 잃는다. 그럼에도 연둣빛 쌀알은 장하다. 우리 집 밖의 다른 생물들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 관대한 마음을 그대로 이식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다짐은 3일을 넘기 어렵지만, 고꾸라질 다짐이라도 일단 오늘은 해본다.
P.S. 김은주 작가님의 책 <나라는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을 추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