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의 사과박스
좀 지나버렸지만, 마르는 휴먼 힐링 공감 위로 가족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즐겁게 보았다. 드라마를 보다가 주무시던 부모님을 깨웠다는 누군가의 후기처럼, 나도 부모님을 떠올렸다. 드라마 3막에서 관식과 애순은 상처 입은 딸 금명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방법으로 딸이 좋아하는 음식, 딸에게 주고픈 귀한 음식을 쉼 없이 퍼 나르는 것을 택한다. 금명의 표현에 따르면 '내가 단 100그램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했다고.
그 장면을 보자마자 엄마와 아빠가 보내는 사과박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부모님은 마르와 앨리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한 달에 1-2번씩 이런저런 것들을 담아 택배로 부친다. 혹시 택배가 이동 중에 허물어지지 않을까 염려해 부실하지 않은 튼튼한 과일박스를 찾는다. 그리고 택배를 부치기 전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먹고 싶은지 번갈아 전화를 건다. 앨리와 마르가 딱히 메뉴를 정하지 않으면, 잡채와 전을 부친다. 어릴 때부터 두 딸이 잘 먹곤 하던 반찬이었고, 엄마에겐 대접하는 잔치 음식의 대표주자인 메뉴를. 그렇게 마음을 담은 먹을 것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러면 도착한다. 할머니의 땅에서 키우고 재배한(직접 농사를 짓는 건 아니고) 쌀과 외갓집에서 담근 김치, 이모가 전해준 들기름, 축협에서 가장 신선할 때 구매한 소고기와 돼지고기, 엄마의 잡채, 아빠의 동그랑땡. 떨어져 살고 있지만, 이렇게 나열해 보면 아직도 가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직도 우리는 엄마의 아기이고,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것 같은.
가족과의 관계가 어떻게 늘 낭만적이기만 하겠는가. 특히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S와 T로 무장한, 건조한 표현방식을 두루 갖추었다. 두 분의 마음을 가장 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택배를 통해서이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박스 하나라도 더 튼튼한 걸로 고르려는 마음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엄마와 아빠가 우리가 무탈하기를 바라는구나. 응원을 전하고 싶구나.' 지레짐작한다. 거기에 우리도 건조하게 "택배 잘 받았어요." 정도로 응답하는데, 그들도 잘 지레짐작해 주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