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 진화 레벨-업! 비둘기 마스터
비둘기 마스터란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비둘기를 무서워하기는커녕, 비둘기를 마주하는 것을 기회로 보고 즐거이 쫓아내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한다. 사전적 의미는 전혀 없고, 마르와 앨리가 만들었다. 비둘기와 관련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앨리의 진화를 지칭할 말이 필요했다. 사실 나(마르)는 비둘기에 별 사감이 없다. 비둘기의 날갯짓 한 번에 엄청난 이가 떨어진다는 낭설 때문에라도, 비둘기가 앞에서 날아가면 약간 꺼림칙한 정도? 굳이 비둘기를 쫓아내려 하거나 빙- 둘러 피하지는 않지만, 건드리지도 않는다. 조용히 지나가고 싶은 마음인데, 큰 소용은 없다. 그런 내 옆에 팔을 크게 벌려 몸을 'T'자로 만든 앨리가 있기 때문이다.
앨리와 비둘기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 보면,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등학생 마르와 대학생 앨리는, 방학을 맞아 견문을 넓히라는 부모님의 제안으로 처음으로 단 둘이서 자유 여행을 갔다, 뉴욕으로. 무슨 깡으로 해외여행 경험도 거의 없는 둘이 그런 결정을 했고 부모님도 허락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부모님의 의도와 다르게, 뉴욕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보고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바로 비둘기였다. 웬 놈의 비둘기가 이렇게 많은지, 정말 징글징글했다. 오래되고 낡은 뉴욕 거리에는 툭하면 20여 마리의 비둘기 떼가 길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곳을 헤치고 지나가야 하는데, 당시 우리에게는 하나의 관문이 더 있었다. 앨리가 비둘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적으로는 이런 움직임이 필요했다. 전방에 비둘기 떼 발견, 적색경보 발령! > 안전하게 건너편 길로 이동해서 이 구역을 지난다. > 필요하면 다시 길을 건너와서 이동을 이어간다.
그런데 아뿔싸, 난이도 상승!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따라서 구글맵과 모바일 데이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여행 가이드북 속 지도에 의존해서, 오로지 본능적인 레이더로 위치를 가늠하며 움직여야 했다. 이때 사람 레이더의 부작용이 있다면, 물리적으로 예민해질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예민해진다는 것이었다. 예민해진 마르는 점점 비둘기 장애물을 돌파하고 싶어졌다. 비둘기를 피해 움직이는 변수가 번거롭고, 눈 딱 감고 참으면 될 일로 여겨졌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나빴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애초에 무서워할 일이겠니?) 앨리에겐 그게 불가능한 일이니, 사태는 커졌다.
그렇다, 우리는 대판 싸웠다. 뉴욕 길거리 한 편에 멈춰 서서 옥신각신했고, 앨리는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도 완전히 화해를 하지 못해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따로 갈 수는 없어서, 네다섯 걸음을 떨어져서 말없이 걸었던 것 같다. 어쩜 애기들의 싸움이란. 지금 생각하면 떨어지고 싶은데 떨어지지 못해서 슬픈 것도 참 웃기다.
다시 오늘의 주제, 비둘기로 돌아오자. 이랬던 앨리가 10년에 걸쳐 점점 비둘기에 대한 무서움을 지워갔다. 오히려 비둘기를 쫓아내는 방법, 'T'자 권법을 알아오더니, 언제부턴가 비둘기를 만나면 "이거 봐라~"를 시전 하기 시작했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을 써도 될까. 진화하는 인간을 볼 때의 감동을, 비둘기를 매개로 느껴도 되는 걸까. 맞고 틀리는 문제를 떠난다면, 일단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러하다.
*T자 권법 : 새 날개 모양으로 양팔을 크게 벌리고, 다리 한쪽을 앞으로 'ㄱ'자로 굽힌다. 비둘기로 하여금, 더 큰 몸집의 새가 날아온 것으로 착각해서 피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앨리, 성장했구나...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