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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Sep 14. 2024

첫 만남 1

내가 상처 낫게 주문 걸었어

 은월이 전학을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본래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친구들과 헤어져서 슬프다거나 등의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하지도 않았다. 아빠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공간으로 이사 간다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운 반은 도저히 은월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조용한 곳을 찾고 찾다가 발견한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종은 점은 도서관에 오는 사람은 은월과 도서부 카운터 위원, 사서 선생님 둘 뿐인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점심시간, 석식 시간에는 카운터 학생 혼자 도서관 문을 열고 닫았고 쉬는 시간에는 사서 선생님 몫이었다. 2학년 층 복도 끝에 위치한 것도, 끝 반인 은월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은월은 매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갔고 그때마다 그가 있었다.     


“안 빌려요? 맨날 읽기만 하는 것 같아서.”    

 

 은월이 도서관을 찾은 지 2주 정도가 되었을 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윤명오. 명찰이 햇빛에 살짝, 빛났다.     



“어차피 쉬는 시간마다 올 건데 굳이 안 빌려도 될 것 같아서요.”     

 첫 대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그날 이후로 명오는 은월에게 더 자주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귀찮은 내색을 보였지만 같은 학년인 것을 알게 되고, 서로의 책 취향이 비슷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은월이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단지 다가오는 명오를 돌려보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친구가 되었다. 지루하기만 했던 학교가 기대되는 장소가 된 찰나였다.


 은월은 책을 따로 빌리지는 않았고 도서관에서 자신이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는 했다. 어차피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서 괜찮을 거라고 명오가 말해주었다. 은월이 읽던 책을 누가 빌리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겠다고 덧붙였다. 아님 아예 내가 네 책은 따로 숨겨둘까? 권력 남용 아냐? 명오가 웃었다. 그만 오는 사람이 없다

는 뜻이지. 은월도 함께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이 책을 펼친 은월이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자신이 책갈피를 끼워 둔 장에 작은 쪽지가 있었다. 누구지, 싶어서 고개를 들어 도서관 내부를 가볍게 훑다가 명오와 눈이 마주쳤다. 문제 있어? 은월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안녕. 쪽지에는 두 글자가 다였다. 은월도 창가에 있는 볼펜으로 그 쪽지에 그래, 안녕. 답장을 써넣었다.

 

그 이후로 은월에겐 특별한 일상이 하나 추가되었다. 도서관에서 자신이 읽은 책 부분 부분에 누가 늘 쪽지를 넣어 두는 것이 반복되었다. 은월은 쉬는 시간마다 책을 펼쳐 그 쪽지에 답을 했고 누군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답은 쉽게 나왔다. 명오. 이 도서관에는 둘 뿐으로 보였으며 저와 친한 사람은 한 명이었기에.


 2개월 정도 은월은 쪽지에 푹 빠져있었다. 쪽지는 어느새 편지가 되었고 서로의 일상도 물었다. 그날도 은월은 책 속의 편지를 보러 석식 시간에도 도서관에 갔다. 살짝 졸려 야자 시간가지만 책장에 기대서 잠깐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명오에게 깨워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가버린 명오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닫혔다.


 그리고는 사건이 발생했다. 명오가 조퇴를 한 바람에 대신 도서관 문을 잠그러 온 사서 선생님이 대충 내부를 훑고 불을 꺼버린 뒤 도서관 문을 잠근 것이다. 은월은 노래를 들으며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눈에 띄기 쉬운 모양새는 아니었다.


 툭툭, 누군가 은월을 깨웠다. 으응, 소리를 내며 은월이 눈을 떴다. 처음 마주한 것은 같은 나이대의 남학생이었다. 귀걸이를 하고 머리색이 약간 붉은. 하복 상의 단추는 다 풀어져 있었고 그 안에 영어가 적힌 하얀 프린팅 반팔 셔츠가 보였다. 순간 놀란 은월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야자 시작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지났을 때였다. 남학생은 자신도 도서관에서 자다가 방금 깨서 급히 불을 켰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괜찮다고 해주었다. 은월이 물었다.      


“종종이라고? 나 너 처음 보는데?”


“나 항상 도서관에만 있는데. 끝 서가에만 앉아 있으니까 네가 못 봤겠지. 신간은 앞 쪽에 진열되어 있으니까.”
 

 은월은 자신과 다르게 너무 태연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서관 유리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꿈쩍도 안 했다.     


“기다리면 누군가 오겠지.”


“밤이잖아. 안 무서워?”


“혼자 갇힐 때는 살짝 오싹했는데. 누구랑 같이 고립되니까 나쁘지 않네.”     


 은월이 그의 말에 정색을 하자 그는 장난이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꺼내 은월에게 보여주었다. 은월이 그를 째려보았다. 그런 게 있었는데 고립이니 뭐니,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냐는 눈빛.     


“난 여기에서 밤새도 괜찮은데. 찾아줄 사람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소원 두 개 들어주라.”     


 은월이 헛웃음을 지었다.     


“싫음 여기 계속 있자.”     


 처음 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아이와 함께 있는 건 더 싫었다. 은월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핸드폰을 켜서 누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몇 분 뒤 선생님이 둘을 찾으러 왔다. 선생님의 화난 표정을 확인한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장난 좀 쳤어요. 얜 잘못 없어요.”     


 선생님은 은월에게 교실로 돌아가라고 하고 그는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교실로 가려던 은월의 발걸음이 멈추고 뒤돌아서 교무실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살짝 열린 교무실 문으로 은월은 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야자 시간이 끝나고 10시가 되자 은월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복도를 살폈다. 아까 반이라도 물어볼걸. 모두가 나간 후에야 은월은 마지막으로 학교를 나왔다. 괜히 집에 가기 싫어서 노래를 들으며 집 근처를 기웃거리는데 꺼진 가로등 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까 그 애. 은월은 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는 몸을 움츠렸다.     


“아까 왜 그렇게 말했어?”     


 은월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후, 하고 긴장 풀린 소리를 냈다. 더 다가가려 하자 그는 얼굴을 돌렸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은월이 두 손으로 그의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는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은월에게 얼굴을 보였다. 입술엔 핏자국이 가득했고 얼굴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와 멍이 있었다. 잠깐 기다려. 어디 가면 안 돼. 신신당부를 한 은월이 집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지나지 않아 은월은 다시 그에게 모습을 보였다. 뛰어왔나. 헉헉대는 은월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은월은 그에게 연고와 면봉, 밴드, 달걀 하나를 건넸다. 그가 달걀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상처에 갖다 대면 나아질걸?”


“원래 다치면 이러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 아니면 안 할래.”     

 은월이 아까 도서관에서처럼 그를 째려보았다.     


“그냥 해. 내가 상처 낫게 주문 걸었어.”     


 그 말에 그는 웃으며 멍이 있는 곳에 달걀을 가져다 대었다. 아야, 실실 웃으며 아픈 척을 했다. 여우 같았던 눈꼬리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귓가의 긴 은색 귀걸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멍 자국을 달걀로 계속 문질렀다. 은월은 소량의 연고를 면봉에 묻혀서 빨간 상처에 살살 발랐다. 이번에는 정말 아픈 건지 인상을 찡그렸다.     


“상처까지 치료해 준 사람의 이름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눈도 다쳤어? 달려 있잖아.”     


 그는 은월의 교복에 달린 명찰로 눈을 돌렸다. 한은월. 낮게 세 글자를 읊조렸다. 어느새 밴드까지 붙인 은월이 면봉과 밴드 껍데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밴드 값은?”


“너도 소원 들어줄까?”


“필요 없어.”


“그럼 뭐?”


“이름. 교복 제대로 입고 다녀.”     


 은월은 그의 상의 교복, 명찰이 있어야 할 부분을 가리켰다. 도서관에서부터 명찰은 없었다.     


“이승주.”


“그걸로 부족해. 왜 다쳤는데? 싸웠어?”     


 승주가 음,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비밀로 해주라. 나중에 알려줄게.”


“싫어. 말 안 해주면 학교에 말할래.”     


 그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다른 건? 다른 거 들어줄게. 이건 진짜 비밀로 하고 싶어서.”


“너 대학 가.”     


 뭐? 하며 묻는 그에게 은월은 눈을 감고 소리쳤다.     


“아까 교무실에서 다 들었어. 공부해서 대학 가. 아까 도서관에서 나 안 혼나게 감싸줬으니까 공부 도와줄게. 내일부터 해. 아니면 학교에 싸운 거 이를 거야.”     


 말을 끝낸 은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얼빠진 승주는 남아서 헛웃음만 지었다. 교무실에서 들은 거면 부모님 없이 혼자 사는 것도 들었을 터. 동정의 눈빛을 보낼까 봐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동정이나 같잖은 위로가 아닌 대학 얘기라니. 학교생활이 조금 재미있어지려나, 승주가 달걀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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