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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Sep 08. 2024

남은 이들의 이야기2

우린 지금 겨울 맞은 다람쥐야? 사랑을 도토리 삼아서?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구나.”


 답사 날짜를 조정할 수 있었음에도 승주는 8월 13일을 고집했다. 서울에 가면 지역이 다르니 생각이 안 날 거라고 바보 같이 믿었다. 그래서 은월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도 태연한 척했던 승주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으면 사진첩에서 기타 사진을 들여다봤다. 아픈 가슴을 애써 모른 척하며 운전석에 올랐다.


“숙소는 여기로 예약할까 하는데, 괜찮아요?”

“......”


 예원이 멍 때리고 있는 승주의 손을 살짝 때렸다. 그제야 승주는 예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숙소 여기로 해도 될까요? 다른 선생님들도 동의하셨어요.”

“아... 네, 좋아요.”


 그때 옆 테이블에서 으악, 소리가 났다. 승주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3반 담임 영운이 삶은 달걀인 줄 알고 날달걀을 깬 것이다. 날달걀을 한참 쳐다보던 승주가 예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디를요?”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괜찮네요. 오늘 기일이거든요.”


 예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숙소만 예약하면 끝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제가 다른 선생님들께 잘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누구 기일이에요?”

“... 가족이요. 부탁드릴게요.”


 승주는 그대로 식당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었지만, 쉬지 않고 도착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납골당에 도착한 승주가 시계를 확인했다. 앞에서 교통사고가 두 번 나는 바람에 더 늦어버렸다. 오후 7시 반. 승주는 수많은 유리관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다 익숙한 이름에 멈칫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승주가 유리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액자 속 사진을 보고 슬픈 미소를 한 번 지어보았다.


“그런데 내 탓 아니야. 자꾸 생각나서 못한 거야.”


 한참을 유리관 내부를 살피던 승주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작은 꽃다발 앞 쪽지. 보고 싶어. 딱 네 글자였다. 승주는 소리 내어 쪽지의 내용을 세 번 읊었다. 확실했다. 생각 정리가 끝나자 승주는 바로 허겁지겁 뛰어서 나갔다.

 현관문 앞에서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은월은 받지 않았다. 이미 비밀번호도 알고 몇 번이나 방문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승주는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런 저의 태도가 은월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도어록을 해제했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집 안의 어둠과 마주했다. 저녁도 안 먹고 자고 있을 은월이 눈에 훤해서 조금 빠르게 거실로 향했다. 승주의 예상과 똑같이 은월은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안아 들어서 침대에 눕힐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침실의 담요를 덮어주었다.

 냉장고 문을 연 승주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페트병에 담긴 물과 남은 배달음식이 전부였다. 자세히 보니 저가 며칠 전에 만들어준 반찬들도 보였다. 고개를 내젓고 밥솥을 열었다. 다행히 밥과 쌀은 어느 정도 있었다. 승주는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앞치마를 자연스럽게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 은월은 눈을 떴다. 밝은 부엌을 쳐다보고는 두 눈을 비볐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좀 일찍 끝났어.”


 승주가 식탁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자 은월은 의아해하면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승주가 밥그릇에 죽을 담아 은월에게 건넸다.


“괜찮다며. 뭐가 괜찮아.”

“너도 안 괜찮아서 왔잖아. 둘 다 똑같아.”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은 제 앞에 있는 죽을 호호 불고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 앗뜨! 은월이 인상을 찌푸리고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승주는 반사적으로 은월의 입가에 손을 댔다. 뱉어. 은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승주를 바라보고는 그 손길을 내쳤다. 승주는 쓴웃음을 한 번 짓고는 휴지를 건넸다.


“너 뜨거운 거, 아픈 거. 그거 그냥 다 나한테 주면 안 돼? 나한테 뱉어주면 안 돼?”

“둘 다 아플 일 있니.”

“옅어질 수는 있잖아.”

“안 그러더라.”


 맛있다. 고마워. 승주는 은월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조금씩 죽을 떠먹는 모습이 살짝 미웠다.


“납골당 다녀왔어.”


 그래? 은월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애써 승주를 바라보지 않았다. 은월의 시선은 식탁에 머물렀다. 차는? 걸어왔어.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평소 승주였다면 바로 거절을 했겠지만 오늘은 집 가는 거리를 혼자 걷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이 쌀쌀하다며 건넨 베이지색 카디건도 거절하지 않았다.

 은월의 집과 승주의 집 사이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을 걸으면서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원의 정자를 지날 때 승주는 걸음을 늦추었다. 인지 못한 은월이 승주를 앞서게 됐다. 은월의 뒷모습을 보며 승주는 말했다.


“네 마음까지는 안 바랄게. 내가 널 사랑할 수 있게만 해주라.”


 은월이 천천히 뒤를 돌아 승주를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가 입가에 표류했다.


“다람쥐들은 겨울을 위해 도토리를 땅 밑에 숨겨둬. 근데 기억이 나빠서 겨울이 되면 도토리를 숨긴 위치를 잊어버린대. 너랑 나는 지금 겨울 맞은 다람쥐야? 사랑을 도토리 삼아서?”

 

 승주가 은월을 꽉 껴안은 채로 엉성한 발음을 이어갔다. 곧이어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눈물이 은월의 머리카락에 스며들었다. 깜빡이던 가로등은 힘을 다 써서 방전되었다. 사방이 깜깜한 채로 몇 분간 기다리다가, 승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졌을 때 은월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두운 거 안 좋아하잖아. 이제 가자.”


 은월이 승주의 손을 잡자 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균등한 간격의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승주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은월은 모른 척해주기 위해 앞만 보고 걸었다. 다 왔다. 들어 가. 응.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승주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승주의 뒷모습을 본 후에야 은월은 주변 벤치에 앉았다. 한꺼번에 복잡한 감정이 토해내고 싶은 만큼 올라왔다. 소리 내서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스스로가 이럴 땐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도착한 승주는 은월의 베이지색 카디건을 먼저 벗었다. 예쁘게 개기 위해 카디건을 소파에 펼치는데, 무언가 둔탁한 게 느껴졌다. 승주는 바로 주머니를 확인했다. 수첩 같은 거라면 지금 당장 줘야 하니까. 그러나 수첩이 아니었다. 날달걀이었다. 승주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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