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꽃들은 빨리 시드니까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깬 은월은 아직 깜깜한 허공을 응시했다. 축축한 느낌에 손을 바라보았다. 닿은 베갯잇에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슬픈 꿈이었나? 자문했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꿈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식탁에 앉아 두통약을 먹었다. 한숨을 쉬고 째깍거리는 시계로 눈을 돌렸다. 새벽 5시 반. 다시 잠들기 애매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미 수면과 관련해서는 결정을 내렸었다. 다시 잘 생각이었으면 두통약 대신 수면제를 먹었을 것이다. 파란빛이 아슬아슬하게 거실 바닥에 들어오는 경계선으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나열했다.
“파란색. 파랑. 하늘. 바다. 파도.”
파도? 은월이 눈을 번뜩였다. 아까의 꿈 조각이 하나씩 떠올랐다. 나 또 꿈꿨구나. 시계 밑에 걸어놓은 달력을 쳐다보았다. 8월 13일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그림이 있었다.
“오늘 날짜가...”
서둘러 방으로 가서 핸드폰을 켰다. 바다 사진 위로 오늘자의 날짜와 시간이 떴다. 8월 13일. 오전 5시 45분. 또다시 한숨을 쉰 은월이 부재중이 찍힌 목록을 훑었다. 15개의 부재중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가장 위에 빨간색으로 쓰인 연락처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기계음이 얼마 지나지 않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별일 없는 거야? 내가 지금 갈까?”
“현실성 없는 얘기 좀 그만해. 너 서울이잖아.”
“지키지 못할 말 내뱉는 성격 아니야, 나.”
승주의 농담 섞인 말에 은월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승주도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안심했다.
“방금 일어났어.”
“나도.”
“그래? 의외네.”
“정말 괜찮아? 같이 안 있어줘도 되겠어?”
“사실 오늘 날짜를 방금 알았어. 알잖아, 나 요즘 많이 바빴던 거. 정말 괜찮아.”
답이 늦는 승주에 은월이 덧붙였다. 은월은 항상 승주를 깊은 생각에서 구해주었다.
“답사 잘 끝내고.”
“응. 그래야지.”
“그래.”
짧은 통화가 끊겼다. 하품을 한 승주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눈을 비비며 다시 이불을 덮었다. 2시까지 진행된 술자리의 마무리는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 해야 하는지라,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은월의 안부를 알 수 있어서 편하게 다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8월 13일. 걱정 많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눈을 뜨니 아침 9시였다. 은월은 딱히 할 게 없어서 소파에 누워 거실의 반 이상을 차지한 파란색 빛을 가만히 바라보았었다. 그 상태로 자각 없이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이유 모를 찝찝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찬물을 맞으며 정신을 겨우 차렸다. 습기 찬 화장실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마주해야 했다.
밝은 청바지와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은 은월은 한참이나 신발장 맞은편에 있는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꿈속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은월은 화들짝 놀라 베이지색 카디건을 벗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켰다. 신발장 위에 둔 작은 꽃다발을 발견해 품속에 안았다. 어젯밤 사 왔는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먼지 가득한 신발장 위에 나뒀는데도 생기를 잃지 않고 어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은월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 꽃들을 살짝 때렸다. 잠깐 다른 색의 겉옷을 입을까, 고민했지만 오늘만큼은 인공적인 찬기를 기꺼이 느끼기로 했다. 작더라도 조금이나마 아픔을 같이 느끼고 싶었다.
은월은 지하철을 타고 납골당에 도착했다. 유리관 안의 사진들을 애틋한 눈빛으로 훑었다. 분명 저런 사진을 찍을 때는 행복한 나날들을 꿈꿨었는데, 행복한 나날들은 그 사진에 갇혔다. 은월은 이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유리관을 열어 시들어진 꽃을 꺼냈다.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망할 꽃들은 너무 빨리 시드니까. 그거 바꿔주려고 오는 거야.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옆에 있어야지.”
작은 꽃다발에 입을 살짝 맞춘 은월이 유리관 안, 둘의 사진 옆에 내려놓았다. 바지 주머니에 있는 수첩을 꺼내 한 장을 찢었다. 은월은 무언가를 끄적이고는 꽃다발 앞에 쪽지를 두었다.
다시 지하철역에 도착한 은월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반. 느리게 한숨을 쉬고 승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처럼 연결음은 얼마 가지 않았다.
“답사 제대로 하는 거 맞아?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네 연락은 언제나 상시대기 중인 거 알면서.”
은월이 침을 삼켰다.
“미안해. 새벽에 예민했던 것 같아. 이런 성격 고쳐야 하는데.”
“모르고 좋아한 것도 아닌데, 뭐.”
은월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납골당 다녀왔어. 넌 괜찮아? 너한테도 중요한 날이잖아.”
“정말 괜찮아.”
그때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승주선생님, 하고 부르는 게 들렸다. 은월은 바로 전화를 끊고 고맙다는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