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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Aug 31. 2024

Prologue

너의 허락이 없는 기다림은 사랑이 맞을까?



 봄에 타올랐다가 겨울에 눈송이처럼 밟히게 되는 사랑은 흔해. 너무나도 뜨거워서 타버릴까 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랑은 없을까? 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끝까지 떠나지 못하는 걸 순애라고 불러도 될까? 너의 허락이 없는 기다림은 사랑이 맞을까?




 -소녀의 일기장 중-


 그 해 오뉴월의 날씨는 캔버스에 펼쳐진 물감 같았다. 아무렇게나 흩어져도 작품이 완성되는 것처럼 하늘도 저에 걸맞은 이름을 불러줄 이를 찾고 있었다. 별들이 낮에는 바다에 숨어 지낸다고 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꼭, 밤에 빛나는 별과 같아서이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별들을 바라보며 유연은 베이지색 카디건이 흩날리지 않게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아무리 좋은 바람이라도, 살결에 닿으면 날카로웠다. 그런 날씨였다, 그때 그 늦봄과 초여름 사이는.


“이거 봐!”


 마침내 연갈색 젖은 모래에 무언갈 다 적은 월이 유연이 있는 파라솔로 손짓했다. 완성했으니 보러 오라는 거였다. 유연은 고개를 젓는 대신 미소를 보였다. 햇빛에 살결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저의 이모를 잘 알기에, 월은 포기하고 유연이 있는 파라솔로 뛰어갔다. 바다로 가고 싶어 하는 바람 사이, 그를 거슬러 뛰어오는 월의 모습이 유연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의 반대로 뛰는 아이. 유연이 본 월의 모습은 그랬다.


“그래도 발 한 번 담그지.”

“바다는 멀리서 봐야 예쁘다니까. 가까이 가면 항상 해를 입어.”


 어느새 유연의 옆에 앉은 월이 두 신발을 벗어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늘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뜨거웠던 연갈색 모래 덩어리들이 뭉쳐져 잘 떨어졌다. 월은 유연의 어깨에 기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냥 날씨가 친절하진 않았다.


“어차피 파도 속에 지워질 거. 왜 그렇게 열심히 그린 거야?”


 유연이 월이 쭈그리고 앉아 몇십 분 동안이나 나뭇가지로 그렸던 자리를 가리켰다. 파도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색이 진해졌다. 월은 아쉬워하지 않고 멍하니 그 자리를 쳐다봤다.


“내가 보고 싶어서 그린 거 아냐. 파도가 휩쓸어 가, 멀리, 아주 저 멀리까지 글자들이 닿길 바라는 거지. 그럴듯하지 않아?”

“그런가, 그래서 뭘 적었어? 누구한테 가길 바랐는데?”

“알잖아, 우리 둘 다 보고 싶어 하는 사람.”

“그래, 그렇지. 맞아.”


 유연이 월의 대답에 씁쓸하게 웃었다. 월은 그를 눈치챈 것인지 시선은 그대로 한 채 유연의 카디건을 꼭 잡았다. 그 작고 하얀 손에 유연은 위로를 받았다. 유연은 본능적으로 지금임을 느꼈다. 오른손으로 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월아.”

“응?”

“그때 그랬잖아. 좀 새로운 사랑 이야기는 없냐고.”


 월이 흥미로운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유연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월은 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 정말 예전에. 천사가 악마를 사랑했어.”

“어쩌다?”

“잘은 모르지만, 날개가 없다고 무리에서 떨어진 천사를 악마가 위로해 줬나 봐.”

“이모. 끝이 슬픈데.”

“새드 엔딩이라고 생각해? 어째서?”


 음, 짧게 입소리를 내던 월이 조용히 입을 뗐다.


“사랑이란 게, 그 사람에게 종속되고 싶은 건데. 악마 둘이나 천사 둘의 사랑 이야기라고 안 하고 악마와 천사라고 딱, 처음부터 선을 그었으니까. 안 봐도 뻔해. 서로에게 종속이 되지 못했겠지.”

“서로에게 종속되지 못한 사랑은, 그러니까 이어지지 못하는 사랑은 슬픈 거야?”


 월이 다시 한번 짧게 입소리를 냈다. 유연의 물음표는 항상 월의 세상에 큰 파동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외가 있을 순 있겠지.”


 월이 유연의 어깨에 기댄 저의 몸을 일으켜 세워 유연과 눈을 맞췄다.


“그래도 많은 사랑의 모양들 중에서 가장 행복하진 않겠지.”


 유연이 부드럽게 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월이 무의식 중 혀로 저의 입술을 적시고 침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다는 거였다.


“이모는, 종속되고 싶었던 적 있어?”

“... 꼭 종속되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는 생각 안 해.”

“해피엔딩이라고는 안 하네.”

“언제 이렇게 컸어, 이모 말에 대꾸도 다 하고.”


 유연이 꽃향기를 내음은 미소를 보이며 월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를 계속 이어갔다. 월은 알고 있었다. 유연은 소유욕이 강하다는 것을. 그래서 불안할 때마다 자신의 것을 쓰다듬고, 안아주고, 만지는 것으로 위안받는 것을. 유연의 손에서 옮겨진 진동은 바닷바람보다  차게 월의 머릿결을 울렸다. 내가  이모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무엇인지 찾아내서  없앨게. 악마를 찾아서  이모 앞으로 데려올게. 침묵과 유연의 미소에 은월은 다짐했다. 머릿결을 계속 만지던 유연의 손을 월이  잡았다. 자신의 다짐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알리는 행위였다. 유연은 계속 웃기만 했다. 여름엔 꽃들이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그래 맞다. 답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월은 몰랐다. 봄보다 여름에  많은 꽃이 핀다는 것을. 고운 살결을 밖에 내보이는 것도 싫어하면서 굳이 바다로 나왔던 유연의 이유를. 사랑이  모양이 있어야 하지 않음을  누구도 월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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