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수-1(2/2)
처음부터 현의 꿈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글 쓰는 게 좋다고 했을 때, 행복하기도 했다. 이수 자신만 지호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호를 공유할 이가 생겼으니까. 유명한 작가가 되었을 때, 지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미처 세상에 나오지 못한 지호의 시들도, 현이 도와줄 수 있도록.
그러나 그 희망은 현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무너졌다. 학교 시 창작 대회에서 누군가 현의 작품을 찢어버렸던 것이다. 좋아했고 기대한 만큼 현은 펑펑 울었다. 현의 마지막 말은 이수의 심장을 추락시켰다.
“엄마. 내 작품에는 힘이 없어. 시에는 원래 힘이 없는 거야?”
이 세상, 유일한 지호의 흔적이 지호와 닮아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엄하게 반대했다. 아직 현에게 지호의 죽음을 단순 교통사고로만 알려뒀기에, 그저 밥벌이 수단도 안 되고, 글에는 힘이 없다며 현의 글쓰기 공책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현의 글쓰기 공책과 마주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결심했다는 뜻이었다.
두 손으로 공책을 있는 힘껏 찢었다. 방향을 바꿔가며 네 번 정도 찢은 후, 불투명한 비닐봉지에 넣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죄책감일까 분노일까. 이수는 알 수 없었다.
이수는 식탁에 다시 앉아 작년 이맘때쯤을 회상했다. 2월 중순, 작은 초밥 집에서의 일이었다. 이수와 현 둘 다 일식을 좋아했기에 웃음 가득한 식사시간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현은 식사 시간 동안 우물쭈물,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식사를 거의 끝내고 이수가 물었다. 하고 싶은 말 있니?
“... 꼭 교대여야만 해요?”
“다른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게 되었니?”
“사범대는 안 돼요?”
이수가 초밥 접시 옆에 두 젓가락을 놓았다. 이수의 한숨은 현의 어깨를 떨리게 했다.
“자살하고 싶니? 엄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 봐왔잖아. 교사가 되고 싶으면 교대를 가야지.”
“죄송합니다.”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내가 미안하지.”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는 아직 지호의 죽음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현에게 교권의 실추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교사가 을이 아닌 사회가 오겠지. 그리고 그때 다 밝혀야지. 내 남편의 억울한 이별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까 현이 나갔을 때가 11시 40분. 12시가 다 되어갔다. 편의점에서 20분 동안 무얼 하는 걸까. 슬슬 걱정이 되었다. 현이 목격하기 전에 비닐에 담긴 공책 조각들도 버려야 했다. 갈색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손에 매달린 불투명한 비닐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분리수거함에 다가가 공책 조각들을 버렸다.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을 옮겼다. 잔뜩 표정을 찡그렸다. 아는 학생을 만나면 안 될 텐데. 그 사건 이후로 밖에서 학교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이수에게 트라우마로 남겨졌다. 내가 그때 차를 몰고 오라고 했자면, 그리고 그 차 안에서 현의 존재를 알렸다면, 지호는 내 옆에 있을까?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들은 겨울바람을 더 따갑게 만들었다. 어렵지 않게 현을 찾을 수 있었다. 편의점 앞에서 키 큰 남자아이와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머리색이 약간 밝았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친한 사이인 듯했다. 현이 장난치듯 그의 어깨를 밀쳤으니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이수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 괜히 씁
쓸 해졌다. 다시 집으로 걸었다. 아까 현의 앞에서 싱의 욕을 한 것은 저의 실수였나 싶었다.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에 누운 이수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12시 30분. 오전에 학원에서 졸면 안 되는데. 조금 더 현의 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부엌의 불을 켜고 저의 가방을 헤집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의 마음 한가운데가 저렸다. 조금 더 분주하게 ‘그’ 공책을 찾는 소리. 몇 분 후. 방에 들어가는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울고 있는 걸까. 노트북에 백업이라도 해야 했을 텐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쁜 엄마 주제에,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6시 50분이었다. 7시에 맞췄던 알람을 끄고 간단히 세수를 했다. 부엌에 가서 어제 만들었던 오트밀 쇠고기 죽을 보온병에 담았다. 집에서 학원이 멀어 7시 20분에 버스가 도착했고, 40분이나 가야 했다. 그래서 아침을 간단하게 챙겨주는 편이었다. 현을 깨우고 분칠을 시작했다. 현은 졸린 눈을 비비며 머리를 감았다. 말리지도 않고 탁탁, 물기를 빼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7시 15분.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현은 이수의 화장대에 멈춰 섰다. 무슨 일 있어?
“난.”
“응.”
“하나도 안 미워요. 다녀올게요. 사랑해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수는 립스틱을 집어던지고는 머리를 두 손으로 짚었다. 거울 너머로 자신의 눈물이 보였다.
지호와 이수의 첫 약속 날이었다. 반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서 이수가 영화관에 30분이나 늦은 날이기도 했다. 영화는 진즉에 시작되었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이수를 보고 지호는 말했다. 이수가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기 전에.
“힘들었지.”
지호는 이수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들을 닦아주었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의자에 앉힌 뒤 물을 사러 발걸음을 옮겼다. 숨을 고르며 초조해하는데, 도착한 지호가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오늘 안 보고 싶었는데, 네 덕분에 잘 된 것 같아. 고마워.”
사랑은 속도였다. 누가 맞추고 싶거나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한 풍경을 위해 멈춘다. 그 풍경과 같이 걷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온전히 그 풍경 속에 빠져 잠기는 것. 지호는 언제나 이수의 속도를 기다렸고 늘 빨랐던 그녀를 멈춰 세워 길가의 꽃을 보여주었다.
“너랑 내가 함께 있을 때 네가 잘못할 일은 없을 거야. 혼자 나쁜 사람이 되지 마. 내가 도와줄게.”
현은 클수록 지호의 태가 났다. 지호를 닮은 아이에게 아픔을 줬다는 건, 이수에게는 또 다른 아픔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꿈이 좌절된 것보다 저의 엄마의 상처가 더 중요했다. 그것 또한 지호의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