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수-1(1/2)
시계가 11시 반을 가리켰다. 아직 현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통 11시에 학원이 마쳐 11시 반에 현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수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학원에서 석식 이후로 현이 자습실에 없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했지만 아들을 위해 미리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아파서 일찍 집에 들어왔다고 거짓말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현이 새 친구가 생긴 것은 알고 있었다. 가족 간의 소통이 부재한 가정은 아니었다. 시우의 정확한 이름은 몰라도, 이수는 현의 이야기로 대충 추론했다. 춤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낭 했다가 1년 늦게 들어온 같은 학교 후배. 이수가 이에 덧붙였다. 공부 못하고, 이상한 것에만 빠진 양아치. 물론 현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 양아치를 친구로 생각하는 듯했으니까, 그래서 그 양아치를 만난 이후부터는 쌓여가는 현의 벌점도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원을 4시간이나 빼먹고, 아무런 연락도 없다는 것은 단단히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수는 확신했다. 양아치랑 오늘 일이 연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현관문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표류했다. 이수는 약간 긴장했다. 여전히 식탁에 앉은 채 팔짱을 꼈다. 다녀왔습니다. 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숙 낮은 목소리로 식탁에 앉으라고 했다. 현은 눈치를 보면서 조심히 앉았다.
“어디 갔다 왔니?”
“... 학원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수가 현의 볼기짝을 세게 때린 것이다. 얼얼해져 오는 손에 매우 놀랐지만, 절대 표현하지 않았다. 일관적인 표정을 유지했다. 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학원에서 연락 왔어, 어디 갔다 왔니?”
“시우 오늘 버스킹 했어요.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거. 내가 있어야 했어요.”
이수는 그 양아치 이름이 시우인 것을 기억해 냈다. 현이 두 달이나 시우의 이름을 꺼냈었지만 주의 깊게 듣지 않아 잊었었다. 화를 참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연락해 줄 수 있었잖니.”
“허락 못 받을 것 같았어요. 저를 위한 공연이었어요. 거짓말한 건 잘못했어요.”
이수가 현의 붉어진 뺨을 어루만졌다. 따가운 건지 현이 움찔거렸다.
“그 시우라는 아이가 그렇게 좋니? 그 아이는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는 애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 뒤로는 뭐가 될까? 단순히 학원 빠지는 걸로 끝날까?”
“잘못했어요. 시우 욕은 하지 말아 주세요.”
처음이었다. 현이 이수의 말에 토를 단 것은. 분명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놀란 기색을 이번에는 감추지 못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은 그 친구를 만난 2개월 동안 변하고 있었다. 좋은 쪽일까 나쁜 쪽일까. 이수는 답할 수 없었다.
“내일 마실 커피를 안 사 와서요, 잠깐 편의점 갔다 올게요.”
학교 내신 시험기간이 아니면 커피를 입에 대지 않는 저의 아들을 잘 알았지만 흔쾌히 허락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현도, 자신도. 현이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패딩을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식탁 옆에 기대 있는 현의 책가방이 이수의 눈에 들어왔다. 침을 한 번 삼켰다. 근거 없는 확신이 가득했다. 설마, 하면서 현의 책가방을 조심히 열었다. 특별한 거 없는 교재들이었다. 안심하고 가방 문을 닫으려던 찰나, ‘국어’ 공책이 번뜩였다.
“허...”
직감은 맞았다. 이름만 ‘국어’ 공책이었지, 안에는 현의 글들로 가득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이수는 현의 글쓰기를 반대했다. 단순 진로 때문이 아니라 취미로도. 그 이후 몇 번 현이 글 쓰는 것을 목격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아주 크게 혼냈고 그렇게 2년간 잠잠하나 싶었다. 그러나 바뀐 건 없었다. 저의 아빠와 지독하게도 닮았다. 그게 그렇게 아팠다.
이수의 삶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를 원했고, 힘든 일 없이 무난하게 임용을 통과했다. 아들을 갖는 것도 어렸을 때의 꿈이었다. 이 큰 두 꿈을 모두 이뤘고 현재도 별 탈 없으니,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며 무난하고 평온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수는 그러려고 노력했다.
이수는 지호의 글을 사랑했다.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고 저만의 명확한 낭만을 꿈꾸는 그가 새로웠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둘은 이수의 친화력으로 빠르게 친해졌다. 작가가 꿈이었던 그에게 자신의 글이 좋다며 다가오는 이수를 내칠 이유가 없었다. 지호는 대학 진학 대신 하루 종일 집에서 글 쓰는 것을 택했고, 이수의 대학교 근처로 자취방을 구했다. 이수는 대학교에서 술자리를 갖고 토론하는 것보다 지호의 자취방에서 그의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지식을 듣는 편을 더 선호했다. 그의 글을 읽는 시간이 가장 저다웠다.
27살. 이수가 임용고시에 합격한 나이. 지호는 시집 두 권과 소설 여러 권을 펴낸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때쯤 서로는 진작 짐작했을 것이다. 좋은 밥벌이도 있는 20대 남성과 여성이 한 번도 이성을 만나지도 않았고 매일 서로에게 의존했다. 이수는 지호였고 지호는 이수였다. 확신이 없어 제삼자에게 감정을 물어보거나 서로의 마음을 가늠하는 행위 또한 서로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서로는 서로에게 확신이자 믿음이었다.
“그냥 같이 살까.”
놀랍게도 제안한 쪽은 이수가 아니라 지호였다.
“작가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영감? 글 계속 써야 하니까.”
“맞아.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네 웃음 한 번으로 나는 수십 편의 시를 써내고, 너의 한 마디 한 마디로 소설을 써. 나한테는 영감이 너야.”
이수는 지호의 말을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단어로도 지호의 사랑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으리라. 눈이 내린 겨울이었다. 그리고 둘의 첫 입맞춤이었다.
이수의 부모는 둘의 결혼에 찬성했고, 지호는 부모가 없었다. 결혼식은 따로 올리지 않기로 했다. 둘 다 동의한 부분이었다. 2년이 지났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길이었다.
“오늘은 야자 감독 아니지?”
“응. 일찍 들어갈 거야. 할 말도 있고.”
“그래? 기대되네.”
지호는 이수에게 짧게 입 맞추었고, 이수는 차에서 내렸다. 지호는 이수가 학교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근처 책방으로 향했다.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프로그램에 초청되었기 때문이었다.
“종이책이 꼭 필요한가요? 요즘은 전자책도 잘 되어 있는데.”
강연이 끝나고 짧게 질의문답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뒤쪽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물었다. 지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아직 저처럼 종이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시에는 힘이 없던데. 솔직히 이런 강연까지 할 정도로 위대한 인간인가.”
“학생의 예의 없는 말보다는 힘이 있겠죠.”
약 서른 명의 사람들 앞에서 지적당한 남학생은 얼굴이 붉어져서 재빠르게 책방을 나갔다. 지호도 그러려니 넘기려고 했는데 일은 퇴근길에 지호가 이수를 데리러 갔을 때 일어났다. 걷고 싶다며 조르는 이수에 지호는 차를 몰지 않고 학교 앞으로 걸어서 갔다. 그리고 둘이 정답게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아까 그 남학생의 눈에
발탁되었다.
그 남학생은 이수의 반 학생이었고,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자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담임이라고 그 남학생은 울분을 토해냈다. 이수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무슨 일인지 도통 말해주지 않고 지호의 품에 안겨 매일을 울었다. 어느 날에는 뺨을 맞은 건지 한쪽이 붉었다. 이만 지호는 참지 못해 재단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집주소를 알아냈다.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이틀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현관문 앞에서 무릎 꿇고 기다렸다. 이수에게는 간단한 모임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삼일 째 되던 날, 지호는 쓰러졌다. 눈앞에 자신의 프러포즈를 받던 이수의 얼굴이 가득했다. 눈 속에 파묻힌 얼굴이 시리지 않았다. 이수가 보고 싶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빈 집에 들어와 이수는 엉엉 울었다. 서랍에 미처 건네지 못했던 산부인과 초음파 사진을 꺼냈다. 그날, 집으로 걸어가면서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일이 꼬여서 미뤘던 것이다. 내심 미안하긴 했던 것인지 그 남학생은 이수에게 지호와 있었던 그날 하루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에는 힘이 없다.”
지호의 사진을 품속에 끌어안으며 이수는 수백 번 되뇌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우리 아이, 내가 잘 키울게. 당신처럼 되지 않도록 내가 막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