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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Sep 06. 2024

세상의 빠른 속도가 버거운 아이

김 현-1


 시나몬 애플 티. 재수학원 1층에 위치한 카페는 현이 유일하게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고작 학원을 위해 밖에 20분 더 일찍 나온 것에 행복을 느끼는 스스로에 한숨이 나왔다. 이러한 삶에도 익숙해져 버린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이토록 껍데기처럼 사는데, 그럴수록 더욱 멀어져 갔다. 투명도가 높아졌다.

 10분 정도는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을까, 생각도 했지만 바로 나갈 생각에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한 플라스틱 컵이 마음에 걸렸다. 딸랑 소리와 함께 의무적인 인사가 귓가에 표류했다. 학원 교재들 덕에 물에 빠진 솜 마냥 무거워진 책가방을 들고 서 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지하 주차장 입구 옆의 벤치에 잠깐 앉아 침식한 어깨를 문질렀다. 5분간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하기로 했다. 간간이 애플시나몬티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혀가 데이지 않게 후후 불어도 늘 혀가 데었다. 그럼에도 입안을 감싸는 달콤한 시나몬 가루와 사과가 내는 감칠맛은 그런 작은 고통 따위야 구태여 즐기기에 충분했다. 한 모금에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기분이 살짝 좋아져 다리를 쭉 뻗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뭐야.”


 쿠당, 익숙지 않은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현의 다리에 걸려 누군가가 넘어졌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에 현은 도와줄 생각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는 기분 나쁘게 뿌리쳤다. 그 바람에 시나몬애플티를 들고 있던 왼손도 함께 흔들렸다. 초췌하게 큰 가방을 메고 있는 학생이 불쌍해 보였던 것인지 넘치도록 플라스틱 컵에 가득 음료를 넣어주신 직원의 인심을 잠깐 잊었다. 뜨거운 몇 방울이 현의 손에 떨어졌다. 아야, 현이 빠르게 손을 놓았다. 덕분에 그에게 찐득할 만큼 달콤한 향을 입히는 선물을 선사하게 되었다. 빈 플라스틱 컵이 바닥에 떨어져 차가운 소리를 냈다.


“야. 이거 어떡할 거야?”


 쌍꺼풀 없는 눈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현이 작게 어깨를 떨었다. 손수건이라도 꺼내서 건네고 싶었지만 이번엔 저 거친 뿌리침을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패딩에 둥글게 젖은 부분을 손으로 닦아냈다. 손에 찐득한 시나몬 가루가 묻었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털었다. 자세히 보니 거칠고 날카로운 말과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와 또래 정도로 가늠했다.


“어떡할 거냐니까.”

“그... 죄송,”


 그의 짜증에 사과를 하려던 찰나, 현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국어학원 지유 선생님.’ 화면을 본 현이 번뜩 일어나 가방을 허겁지겁 메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학원에 늦었음이 더 중요한 중대사항인 현이었다.


“화상 당할 뻔했어. 안 보여?”

“... 옷이 두꺼워서 괜찮으신 것 같은데.”

“뭐?”

“손길 뿌리친 것도 그쪽이고...”


 입술을 삐죽이면서 그의 말에 하나씩 대꾸했다. 그 눈매를 다시 볼 자신은 없어서 두 눈은 가방으로 고정했다. 1분이 더 지났다. 크게 혼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과 없이 모른 척 지날 정도로 유연한 성격은 아닌지라 손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아니, 또 뿌리칠까 봐 던졌다.


“진짜 죄송한데 저 학원 가봐야 하거든요.”

“야!”


 가방을 다 맨 현이 그를 뒤로 하고 학원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이 계속 들리긴 했지만 학원이 더 중요했다. 마음에 걸리긴 했어도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괜찮으리라.

 멀리 뛰어가는 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괜히 발길질을 두어 번 해댔다. 안 그래도 목요일인데 재수 없게. 현이 잘못 던져 바닥으로 떨어진 손수건을 잡어 들어 자수를 살펴봤다. 김 현. 익숙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얼굴은 분명 처음 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손수건을 패딩 주머니에 아무렇지 않게 쑤셔 넣었다. 패딩에 가려진 교복이 살짝 보였다. 그 사이, 많이 훼손이 된 명찰이 살짝 빛났다. 이시우.


 다행히 학생들 앞에서 꾸지람을 듣는 수치는 면했다.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추운 날씨에 헉헉대며 땀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고서는 혼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겨울방학 동안 재수학원에서 하루 13시간 공부하는 학생은 조금의 편애의 눈빛이 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이기도 했다, 현은 한숨을 돌리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북적이는 곳은 저의 공간이 아닌 듯했다. 아까 일어난 불상사에 대한 걱정을 다 떨치지는 못했지만 눈앞의 숫자들의 경쟁에 희미해져 갔다. 다시 사람을 숫자로 평가하는 세상과 마주할 차례였다.

 찌뿌둥한 몸을 펴니 8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숙제를 덜하거나 20분 이상 지각한 사람은 남으라는 지유의 일침에 학생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허기를 달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9시까지만 시간 맞춰 들어가면 부모님께 연락은 가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자습시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어 학생들의 시선은 느끼겠지만.

 재수학원 건물의 1층에는 카페뿐 아니라 작은 편의점도 있었다. 재수학원은 14층에서 16층까지 인지라 1층 편의점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었는데, 가끔씩 속임수를 써먹을 것을 사는 학생들과 시간이 애매해 밥을 간단히 때워야 하는 대학생 조교들을 몇 주째 보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학원 시간 때문에 지금에서야 허기를 달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편의점의 영향력을 아예 무시하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한 현이었다. 작은 컵라면과 흰 우유를 사서 구석에 앉았다. 아는 얼굴을 마주치면 불편하리라.


“어라.”


 과자 코너를 돌던 시우가 현을 발견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현은 듣지 못했는지 핸드폰을 보며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썹이 까닥, 움직인 시우가 현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아까 도망치듯 간 학원에서는 잘했고?”


 현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큰 죄를 지은 것 마냥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썩 달갑지 않은 건지 시우가 표정을 풀었다. 얼굴에 힘을 빼자 강아지 닮은 눈매가 되었다. 그에 현도 경직된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아깐... 죄송했어요. 정말 학원이 늦었거든요.”

“그럼 천 원만.”

“에?”

“미안하다며.”


 의구심이 들었지만 잘못한 게 있으니 더 묻지 않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그걸 받고 바로 자리를 뜨는가, 싶었지만 2분 뒤 초콜릿우유를 하나 들고 다시 현의 자리 앞에 앉았다.


“면 분 게 취향이면 계속 기다리시고.”

“아? 아...”


 시우의 말에 현은 다급하게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시우도 초콜릿우유의 갑을 뜯었다.


“밥이라기엔 적은 양인데. 하긴 시간도 늦었으니 그냥 간식인가?”

“저녁밥 맞아요. 배부르면 졸리니까. 항상 적게 먹으려고 하고 있고.”

“하여간 범생이들은 이해가 안 된다니까. 공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러게요. 나도 이해가 잘 안 돼요. 뒷말은 삼켰다. 시우에게선 왠지 모를 위협감이 느껴졌다.


“그쪽은 그럼 밥 먹었어요?”

“이게 밥이지.”


 시우가 초코우유 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긴 손가락으로 입술에 묻은 우유를 훑어냈다.


“그쪽도 공부 때문에?”

“성실한 학생들은 보통 머리색에 힘을 안 주지 않나?”


 현이 자세히 시우의 머리카락을 살펴보니 연한 갈색이었다. 아깐 자연 갈색 머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 더워. 편의점의 히터에 시우가 패딩을 벗어 옆 의자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그 안에 둥근 자국이 난 교복이 보였다. 현이 놀라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시우가 현과 눈을 맞추었다.


“학생처럼 안 보여서?”

“학생인 것 같긴 했는데...”


 그럼 왜? 시우가 순수한 눈빛으로 그렇게 묻는 듯했다. 어차피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현은 밝히지 않기로 다짐했다.


“방학인데 교복 입고 있길래...”

“엄마가 곧 재혼하는데 목요일마다 셋이서 식사를 같이 해. 그래도 단정한 모습이 좋다고 교복도 입고 오라고 그래서.”


 딱히 궁금하진 않았으나 대꾸 없이 듣기로 했다. 현이 나무젓가락을 들어 면을 뒤적거렸다. 면은 불었다.


“다행히 패딩이 두꺼워서 화상은 안 입었어. 아, ‘불행히’인 건가? 병원 갔으면 그 새끼 안 봐도 되는 거였으니까.”


 역시나 현은 대꾸 없이 남은 라면을 먹었다. 작은 컵이라 그런지 배가 차는 것보다는 뇌에게 뭐라도 먹었다고 알리는 것 같았다.

 국물을 버리고 가방을 챙기려는데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시우가 눈에 밟혔다. 지갑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그려다가 허리를 돌려 시우와 마주했다.


“아직 시간도 남았고. 얘기 들어드릴까요? 세탁비, 혹은 병원비 대신.”

“오늘 처음 본 남한테 입이 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처음 본 사람이 어떨 땐 가장 나아요. 날 모르는 사람이니까, 날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니까. 어디 소문내도 이득 보는 것도 없고.”


 시우가 조용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긍정의 표시 같았다.

 현이 교복을 살피다 명찰을 발견했다. 명찰의 색이 빨간색이었다. 자신보다 한 학년 낮다는 뜻이었다.


“이시우?”

“아, 응. 내 이름. 넌 김현이던데.”

 현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시우가 주머니 안에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친절히 자수를 가리켜주기도 했다.


“맞다. 자수.”


 현이 저의 손수건을 다시 가져가려 손을 뻗자, 시우가 냉큼 다시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현이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시우를 쳐다보았다.


“그냥 주는 건 좀 그렇고. 나중에 크게 한 번 도와주면 그때 다시 줄게.”

“순 막무가내네.”


 현도 놀랐는지 말을 뱉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살살 시우의 눈치를 살피었다. 거칠어 보였던 눈매가 유연하게 풀어졌다. 시우의 눈웃음에 어정쩡하게 입을 가렸던 두 손을 무릎 위로 다시 살포시 내렸다.


“보기보다 성격 있으시네.”

“그래서 17살인... 가?”


 현이 명찰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과 밑 학년의 학생에게 더 이상 존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유급해서 18살. 1학년은 맞아.”


 아.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지. 같은 학교인가? 17살? 18살?”


 같은 학교임을 밝히지 않겠다던 다짐은 시우의 연해진 표정에 수포가 되었다.


“18살. 2학년.”

“곧 그 귀하다는 고삼이네.”


 시우는 몇 주 있으면 새해라는 것을 인지하고 한 말이었다. ‘고삼’이라는 단어에 현이 한숨을 쉬었다. 반쯤 남아있는 시우의 초콜릿우유가 보였다.


“남은 밥 안 먹어?”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아서. 그리고 내 시름 풀어낼 사람을 방금 구했는걸. 딱히 가치가 없지, 이젠.”


 ‘시름을 풀어낼 사람’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것을 알기에, 현의 귀는 빨개졌다. 별 거 아닌 자신이 별 것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들어주는 게 그렇게 가치 있는 일도 아닌데.”

“그래? 그럼 넌 주변에 네 얘기 잘 들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거네. 부럽다.”

“딱히. 그냥 내가 말을 잘 안 해.”

“있지, 나는 물음표가 필요한데 자꾸 사람들은 나한테 느낌표만 던져준다. 그래서 유일한 물음표인 네가 좀,,, 가치가 있지. 새롭지.”


 학원에 도착하니 9시 20분이었다. 시우의 이야기에 푹 빠진 탓에, 현은 시계를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했었음을 잊었다. 카운터 조교 선생님들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학원 안으로 발을 한 걸음, 뗐다. 한 분과 눈이 마주쳤지만 빨리 들어가라는 손짓만 하셨다. 입실카드를 찍고 제2 자습실로 들어갔다. 조용히 가방을 풀고 필통과 교재들을 꺼내는데 왠지 모르게 꾹 묶여있던 수갑이나 족쇄 따위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해방감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죽을 것 같이 지난 3주를 힘겹게 살아왔었는데, 오늘 살짝 시간을 어겼음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의 첫 일탈이었다. 현은 기념하기 위해 스터디 플래너 오늘 날짜 위에 작게 적었다. 9시 20분 입실. 그리고 더 작게. 핸드폰 미제출. 현은 바지 주머니 속 핸드폰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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