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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Sep 20. 2024

한 발짝 나아가는 아이

김 현-2

 맹세코 현은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그러기 위해서 학원을 빠진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아무 연락 없이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우의 버스킹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저를 위한, 가야 했다. 무슨 수가 있더라도.


 2월 첫 주의 금요일이었다. 편의점에서 시우의 몫인 흰 우유까지 사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헉헉대면서 들어왔다. 테이블에 있는 흰 우유를 한 입 마셨다. 늦게 온 시우가 못마땅했던 것인지 현은 괜히 입을 삐죽거렸다.


“내 우유면 어떡하려고.”

“지난 12월부터 2월까지. 맨날 가공유만 드셨잖아요.”

“그래서 왜 늦었는데?”


 현이 라면의 뚜껑을 벗기면서 물었다.


“다음 주 금요일. 너 시간 돼?”

“뭐, 오늘처럼 똑같겠지?”


 시우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 버스킹 하기로 했어. 길거리 무대에서 공연하는 거. 어쩌다가 전 학원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는데 자리 하나 비었다고. 다행히 학원 끊기 전에 배웠던 동작들이라.”


 현이 활짝 웃어 보였다.


“정말 잘 된 거잖아! 행복하겠다.”

“맞아. 근데 춤 때문은 아니야.”

“그럼?”


 시우가 나무젓가락을 뜯어 현에게 건넸다.


“드디어 너한테 멋진 모습 보여줄 수 있게 되었잖아. 그동안은 양아치 모습만 보였으니까.”

“에이. 아니야.”

“그런데... 그치. 힘들겠지? 모범생님께서 하루 학원 빠지는 건 쉬운 일 아닐 거니까. 영상 보여주면 되겠다.”


 현이 라면국물만 멍하니 쳐다봤다. 뭐 해? 시우가 물었다.


“공연 시간 언제야?”

“8시에서 10시. 끝나고 한 시간은 간단한 뒤풀이.”

“... 빠질 수 있어.”


 시우가 눈을 번뜩였다.


“아니야. 무리하지 마. 그렇게 큰 공연 아닌데. 너한텐 일탈이잖아.”

“무료로 멋진 공연 보는데 값은 치러야지. 그리고 너 만나고 나서 익숙해졌어. 착해지지 않는 연습.”


 정말? 올 수 있는 거야? 시우의 푹 처졌던 눈꼬리가 올라갔다. 현은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좋아할 거면서 괜히 아닌 척은. 시우를 길들이는 방법은 진즉에 터득했었다.


 그리고 2월 둘째 주의 금요일. 현은 석식 시간이 되어 퇴실 카드를 찍고 아래층의 식당으로 계단을 이용하여 내려갔다. 계단 문을 열려던 순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7시 20분. 이미 핸드폰은 가지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잠깐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보기 전에 얼른 밑층의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 층 더, 더 밑으로. 그렇게 1층까지 내려왔다. 등 뒤에서 땀줄기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1층에서 밖으로 나간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을 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시우의 학원 수강생들은 수가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 2시간 내내 수많은 얼굴들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시우의 얼굴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손을 흔들기도 하고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긴 거리도 아니었는데 시우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빨리 시간이 가고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핸드폰을 켜기엔 두려웠다. 조용히 기다렸다. 시우는 현을 혼자 둘 사람이 아니었다. 현도 잘 알고 있었다.


 시우는 현의 손목을 잡고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사장이 시우 부친과 친한 사이였기에, 근처에 일이 있으면 꼭 들르고는 했다. 사장인 재안은 시우가 친구를 데려온 게 기쁜 모양이었는지 무료로 음료 두 잔을 대접했다. 문득 뒤풀이가 생각나 현이 물었다.


“11시까지 일정 더 있는 거 아니야?”

“왜, 보내려고? 학원까지 빠진 엄청난 일탈을 하신 짹짹이님 칭찬해주려 했더니.”

“아니... 나 때문에 빠진 거면...”

“어차피 다 학원 다니는 사람들이야. 중간에 낀 난 갈 자격도 없지.”


 시우가 초코라테를 한 입 시원하게 마셨다. 얼굴에는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너 다시 학원 가고 싶지.”

“내 전부였으니까. 근데 뭐, 어쩔 수가 있나.”


 현은 사과향이 나는 달달한 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아 맞다.


“난 너만 보였는데. 넌 나 안 보였어?”

“보였지. 나도 너만.”

“한 번도 안 봐주던데?”

“너 보면 내가 바로 웃어버릴 것 같아서. 멋지게 보여야 하는 무대잖아. 일부러 피했지.”


 현이 씩 웃었다. 제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시우가 편했다. 시우와는 어떠한 가면, 역할, 의무, 가면 없이도 오로지 저의 모습으로 마주해도 괜찮았다.


 어느덧 손목시계의 바늘이 11시를 가리켰다. 11시 반까지는 집에 도착해야 했기에 서둘러 차를 다 마시고 패딩을 입었다. 한사코 말렸지만 할 것도 없고 집에 들어가기 이르다며 시우는 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비밀번호를 눌러다. 왜 달콤함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일까.


  뺨을 맞았지만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을 옭아매었던 가시 덩굴이 풀리는 듯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보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딱 하나, 이수의 얼굴이 슬펐다는 것. 분명 자신이 잘못해서 맞은 건데 미안해하는 표정.

 좋은 기분으로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기에 시우는 현의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어라, 시우의 눈에 익숙한 형체가 들어왔다.


“엄마랑 싸웠어?”


 현이 시우의 옆에 앉았다.


“응. 학원도 빠지고 엄마한테 뺨도 맞고.”


 시우가 현의 붉어진 한쪽 뺨을 어루만졌다.


“어때. 생각보다 괜찮았지.”

“응. 그 아무것도 아닌 걸 왜 여태 무서워했지. 너무 시원하다.”


 잘했어. 근데 나 배고파. 불현듯 현이 학원에서 석식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시우도 혹여 공연 중 속이 안 좋을까 하루 종일 공복이었다.


“또 우유 마실 거야?”

“아니. 오늘은 소화 잘 될 것 같아서.”


 시간을 확인해야 했으나 핸드폰을 켜기 싫었다. 이수의 연락이 있을까 봐. 편의점에서 나와 늦게 들어가겠다고 벤치에 앉은 시우를 뒤로 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시우의 희미한 형태가 보였다.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수가 발견해서 저의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주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식탁에 있던 가방의 글 공책이 사라졌어도 슬픔 혹은 분노를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침착했다. 다만 궁금했다. 글을 읽었을까?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 놓고 글을 쓰고, 이 실력을 이수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현은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글 공책에 항상 무언가를 쓸 때마다 바로 노트북에 옮겨 두는 습관을 가진 저를 칭찬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항상 자신의 꿈을 반대할 때마다 미안해하고 아파하면서 굳이 반대하는 이유를, 현은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그럴 거라고 다짐했다. 이수의 눈에서 편안함을 보고 싶었다.


 현이 이수에게 말을 건네고 현관문에 다가갔을 때 안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은 원래 이해 안 되는 생명체거겠니, 싶었다. 손에 쥔 보온병이 따뜻했다. 지갑에 넣어둔 지호의 사진을 꺼내 바라보았다. 오늘은 엄마 꿈에 나타나주세요.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잖아.


 시우가 현을 찾아온 것은 학원의 1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는데, 누군가 잽싸게 현의 팔목을 잡아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시우가 마스크와 후드를 벗자 그제야 현은 안심했다.


“비상계단에는 CCTV 없다며. 쉬는 시간 맞춰서 왔어. 홈페이지 들어가서 확인했고.”


 시우가 현의 손목을 쥐고서는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15분 남았으니까 충분하지? 걱정 마. 빨리 갈 거야.”

“대체 왜...”

“이거 주려고.”

 

 시우가 현의 손에 무언가 쥐어주었다. 현이 고개를 숙였다. ‘국어’라고 적힌 공책, 테이프로 꽁꽁 둘렀지만 숨겨지지 않은 찢긴 부분. 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걸 본 시우가 민망한 듯 오른 팔로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가봐야겠다. 슬슬 불안해.”


 시우가 계단을 향해 몸을 돌리자 현이 그를 붙잡았다.


“그런데 너... 아니지? 15층까지 계단으로 걸어서 올라온 거.”

“그 정도로 내가 널 아끼지는 않을 걸.”

“... 정말이지?”

“이제 진짜 간다. 공부 열심히 해.”


 시우가 빠르게 현에게 윙크한 뒤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현은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얼떨떨했다. 공책을 펴서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찢긴 부분 모두 테이프와 풀이 발려있었다. 심지어 아예 사라진 부분에는 자신이 새로운 종이를 덧붙이거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이어 쓴 것 같았다.


“강의 들을 거 있어?”


 14층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카운터 조교가 현에게 물었다. 현은 아차, 싶었다.


“아뇨, 그냥... 하늘 보고 싶어서요. 창문은 비상구 계단에만 있으니까.”

“그래도 조심해. 벌점 받잖아.”


 네. 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상구 계단 회색 철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어라, 그런데. 조교의 말에 현은 뒤돌아봤다.


“뭐 좋은 일 있어? 한 번도 이렇게 웃는 거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 웃고 있어요...?”

“응. 행복한 일 있었어?”

“...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그렇담 좋지. 그래도 연애는 안 되는 거 알지? 조교가 현에게 졸음 껌 하나를 건넸다. 당연하죠. 현이 웃으면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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