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우-1(2/2)
익숙하지 않은 축축한 느낌에 인우는 꿈속에서 깼다. 커튼 틈으로 가리지 못한 빛들이 베개를 비췄다. 눈물범벅이 되어 회색 자국이 가득한 베개를. 또 옛날 꿈꿨구나. 인우는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한 시였다. 그래도 다섯 시간은 잔 것이었다. 수면제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건 확실했다.
여전히 윤에게서부터 연락은 없었다. 어떻게 이 영상을 얻었는지, 혹은 시우의 허리를 고치는 방법이라든가 시우가 춤을 못 추게 막는 또 다른 방법 같은 건 없는지. 이러한 연락이라도 원했지만 핸드폰 창은 조용했다. 인우는 느린 침을 삼키고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이 받았다.
“춤 영상 봤어?”
“으응, 아침에 봤어.”
그런데도 왜 연락을 안 했지? 궁금한 게 없었을까? 의문들을 곱씹었다.
“점심 먹었어? 시우랑 같이 나올래?”
“아냐, 집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아빠 얘기를 꺼내더라고.”
인우는 순간 멈칫했다.
“뭐라고 그랬어? 아는 눈치는 아니었지? 상처받을 거야. 절대로...”
“간섭 그만하면 안 돼?”
오랜만에 듣는 신경질 섞인 목소리. 날카로운 말끝. 인우는 윤을 잘 알고 있었다. 싫은 사람한테 저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내가 편해서 저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간섭이라니?”
“가족 얘기야.”
윤은 인우가 두려워했던 걸 실현시키고야 말았다. 가족으로 선을 긋는 것. 영원히 자신이 윤의 옆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해 버렸다.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줘. 목요일에 식사 자리 갖는 건 변동 없는 거지?”
“그것도... 다시 생각해 볼게. 이렇게 계속 만나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나 주현이 때문에 힘들까 봐 네가 봉사해 주는 거잖아.”
“... 다시 연락할게.”
인우는 늘 회피했다. 홧김에, 순간의 기분 탓에 윤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분노를 잘 조절 못하는 인우였기에 윤의 앞에서는 늘 한 걸음 물러섰다. 누구는 답답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인우가 윤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봉사. 봉사라고? 인우는 눈을 감고 옛 기억 속으로 도망쳤다.
인우와 윤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윤이 인우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학원 끝나고 밤에 집에 걸어갈 때, 누가 자꾸 자신을 따라온다고. 인우는 곧바로 걱정하며 늘 학원이 끝나면 데려다준다고 했었다. 그렇게 윤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30분이나 다시 걸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 인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스스럼없이 부탁한 거지? 자신이 무섭다는 걸 바로 나한테만 알려준 거지? 내가 조금은 특별한 걸까?
바람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어느 날 자각과 함께 새롭게 찾아왔다. 가슴 설레는 달콤한 기분이 새롭게 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우는 그런 낭만은 윤과 자신의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우의 하루들은 점점 윤으로 끝나기 시작했다. 첫날은 정말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한 일주일 정도 지나자 그런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 번 시작했던 걱정은 끝날 수가 없었다. 가로등 하나인데 위험하지는 않을까? 걸어서 15분이라니. 너무 위험하잖아. 실제로는 자신이 집에 가는 길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고 걸어서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렇게 계산적일 틈도 없었다. 윤을 생각하면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 온통 환하게 밝혀졌다. 그러다 가만히 인우는 생각했다. 가로등이 열 개가 있더라도 자신은 윤을 걱정하지 않을까? 나는 네 생각만으로 어두운 길을 이겨내는데 너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같은 생각을 하길 바라면 내가 이상한 걸까?
인우는 그날 집에 가면서 우연히 자신의 집 앞에 세워진 가로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제 가로등 볼 때마다, 어쩌면...
인우의 가로등은 몇 주 뒤에 바로 꺼졌다.
“이제 안 도와줘도 돼.”
“왜? 아직 모르잖아. 누가 또 따라올지도 모르고.”
“너 시간 낭비하는 거니까. 애초에 네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봉사해 주는 것도 미안했어.”
인우는 봉사라는 단어가 마음에 아리게 박혔다. 왜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내 마음을 받지? 그냥 내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받아주면 안 되는 건가? 왜 그렇게 복잡하게 계산해? 인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물음표를 달아보았다. 윤은 늘 인우에게 물음표였다.
인우는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눈을 떴다. 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윤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똑같이 인우의 마음을 미안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대체 어떻게 해야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지? 그냥 내 마음을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는데. 수신인이 거부하는 마음은 사랑이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