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중에 배려라는 이름에 숨어서 너한테 상처 주면 어떡해
명오는 조용히 잠들어있는 승주의 손을 잡아 흔들었고 승주는 으응, 하면서 잠에서 깼다. 졸음에 반쯤 뜨지도 않은 눈이 명오를 보자마자 커다랗게 되었다.
“뭐야, 언제 깼어?”
“방금.”
승주는 슬슬 명오의 눈치를 봤다.
“심장병 얘기는... 어쩔 수 없이 들은 거야. 내가 알아내려고 한 건 절대 아니고.”
피식, 명오가 웃음을 흘려 내보냈다.
“화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숨긴 거잖아.”
“지금 내 감정이 중요해? 네 몸 상태가 중요하지. 지금은 괜찮아?”
“괜찮아.”
승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밴드 노래 하나도 못 낼까 봐 그런 거지.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알겠어. 다 믿을게. 부끄러워하지 마.”
그 말에 더 귓가가 빨개진 승주였지만 정작 명오는 보지 못했다.
명오의 모친이 잠에서 깬 명오를 보고 후다닥 달려왔다. 그녀는 계속 승주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어 했지만 승주는 연신 거절했다.
“죄송해요.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
끝끝내 승주는 학교를 무단으로 나왔다던지, 그 때문에 아빠한테 혼날 거라는 얘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명오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명오에게는 미안해하는 얼굴이 어울리지 않았다. 웃는 얼굴이면 충분했다.
“그럼 또 보자.”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승주의 교복 카라를 정리해 주었다. 또 보자는 말에 살짝 힘이 들어간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인가, 하면서 넘겼다.
아직 10월인데도 저녁과 낮의 경계선이 분명해졌다. 음악실에서 혼자 드럼을 연습하고 학교 과제를 하던 명오는 저녁 시간이 되어 학교를 나섰다. 그날 이후로 승주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연락은 받지 않았고 집 주소도 몰랐다. 교무실에 가서 여쭤도 봤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꺼려하시는 것 같아서 구태여 알아내지도 못헀다. 승주의 집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은 부친이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악기를 버릴 정도로 폭력적이다, 아니 그런 것 같다,라는 추측뿐이었다. 명오는 승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같이 하교는 했지만 승주를 데려다준 적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가겠다는 핑계로 동의 아파트나 주택 단지를 배회했다.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아 실망은 했다. 기대 없이도 실망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이 되면.
밖에 나온 지 벌써 2시간이 되었다. 명오는 휭, 하고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자신이 외투를 챙겨 입지 않았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 손으로 팔을 어루만지며 가로등 불빛에 의존한 채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옆 상가 1층 편의점의 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찾던 얼굴도.
발견하는 즉시 서운함을 풀어내려던 명오의 다짐은 승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지고야 말았다. 잔뜩 멍이 든 얼굴과 찢어진 틈으로 피가 굳은 입술. 자세히 보니 긁힌 것인지, 살결이 까인 상처도 있었다. 승주는 민망한 듯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숨기려 했다. 승주가 어둠에 숨을수록 명오는 더더욱 울음을 참아야 했다. 그 표정을 본 승주는 성급히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여주었다. 왜 울고 그래.
명오는 편의점에 들어가 밴드와 연고, 삶은 달걀을 샀다. 밴드와 연고로 승주의 얼고을 간단히 치료하는데 승주가 물었다. 계란은 왜? 멍들었잖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있어. 아, 하고 입소리를 낸 승주는 심각한 얼굴의 명오를 보고는 헤헤, 웃었다. 명오는 째릿, 승주를 노려보았다.
“웃음이 나와?”
“우는 것보단 낫겠지. 애초에 네가 있는데 왜 우냐?”
명오가 두 번째 상처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명오의 손에 찐득거리는 감각이 묻어 나왔다. 명오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뭘?”
“내가 궁금해해도 되는 부분인지. 그럴 자격이 있는 건지. 해결해주지도 못할 건데 함부로 듣고, 무의식 중에 배려라는 이름에 숨어서 너한테 상처 주면 어떡해.”
“의도 없는 상처는 흉터가 지지 않아.”
명오가 두 번째 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네가 다 치료해 줄 거잖아. 지금처럼. 그러니까 말하는 건데, 궁금해해 줘라. 알고 싶어 해 줘.”
명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주의 최초의 기억은 부친에게 매를 맞는 것이었다. 발음이 뭉개져가면서도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싹싹 빌면서 머리채 잡히던 순간들이었다.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부친에게는 그 무엇도 먼저 말 걸거나 물어보기 무서웠고 자신이 그나마 가족이라 여겼던 할머니조차도 엄마에 대해서 언급하면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럼에도 승주는 괜찮았다. 힘들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할머니가 있으니까.
할머니 집에 자주 가는 게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승주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거리가 멀지 않아 주말마다 할머니 집을 방문했지만 언제부턴가 학교가 마치면 저녁을 먹을 때까지 할머니 집에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틀이나 삼일, 그리고 일주일, 한 달. 이렇게 늘어갔다. 부친이 승주를 보러 오는 건 한 달에 한 번 꼴이 되었다.
“버리지, 말아주세요.”
승주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삼 개월에 한 번 오던 부친의 소매를 꼭 잡았다.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매번 올 때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짜증을 토해내던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모든 게 끝났다는 것처럼. 그래서 승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가족한테 버려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정말 버려질 것 같아서. 돌아오는 건 욕설과 주먹뿐이었다.
부친이 매달 보내던 돈은 승주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끊겼다. 승주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할 수 있는,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할머니도 일자리를 매번 찾았지만 승주는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둘 뿐이었다. 어떻게 서든 건강하게, 오래 있길 바랐다.
부친이 가끔 승주를 찾아올 때가 있긴 했다. 술에 취해서 사업이니 투자니 얘기를 꺼내면서. 그리고 술병이나 골프채를 휘두르며. 승주는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안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자신이 문을 틀어막고 부친과 맞섰다. 거의 맞는 거였지만. 이웃이 뭔가 이상함을 느껴 찾아오거나 신고하면 그제야 끝냈다. 제 손으로 부친을 신고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해도 관두었다. 어쨌거나 남은 아니었다. 자신의 부친이었다. 할머니 다음으로 유일한 가족.
세상에는 따뜻한 어른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대다수였다. 학교장 허락과 부친의 동의를 얻어 어렵게 얻어낸 곳들에서도 툭하면 돈을 훔쳤다고 오해를 받거나 안 좋은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잠자코 듣던 명오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승주는 붉어진 귀를 부여잡으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흠, 명오가 흥미롭게 그런 승주를 쳐다보았다.
“도와준 애가, 있었는데...”
승주는 다시 한번 말끝을 흐렸다. 두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도 있었다. 명오는 그날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이름은 알아?”
“다 몰라. 갠 내 얼굴도 모를걸.”
그런데도 좋아할 수 있다고? 명오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으면 한 번에 이렇게 빠지는 건가? 근데 내가 걔보다 더 도와주고 있지 않나? 나랑은 다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