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자세
뉴욕 둘째날 아침 7시에 숙소를 나섰다. 하룻밤 사이 글을 적으며 각성한 덕에 의욕이 충만했다. 아침으로 베이글과 커피를 먹고 센트럴파크까지 걸어가며 패트릭성당, 라디오시티, 트럼프타워, 플라자호텔, 그리고 미국의 여러 은행, 기업 건물들을 보았다. 이른시간 덕에 사람이 덜 붐빈 것도 있지만 우산을 쓰고 뉴요커들의 출근길을 구경하며 나도 그들처럼 커피도 마시고 바나나푸딩도 사먹었다. 타임스퀘어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나기만 해도 또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센트럴파크는 내가 사진으로 보았던 푸릇푸릇한 뷰는 아니었지만 은행과 단풍이 지는 풍경과 이슬비 내리는 뿌연 안개 속에서 러닝중인 뉴요커들을 보니 비 오는 뉴욕의 매력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동물원 입구에서 담너머 물개들 헤엄치는 것도 보고 도토리 까먹는 다람쥐들은 볼때마다 귀여워서 핸드폰 카메라를 켜게 됐다. 센트럴파크의 포토존인 체리힐, 베데스다테라스, 보우 브릿지를 지나 메트로폴리탄 까지 걸었다. 비오고 춥고 손시려운 와중에 기분은 상쾌하고 좋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계획에 없었는데 공항 셔틀 기사님 추천으로 가게되었다. 숙소에서 7시에 나와 이곳저곳 구경하고 먹으며 센트럴파크를 지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은 9시50분. 10시 오픈인 이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오픈런 할 생각은 없었는데 검색해 보니 오픈런 해야 비교적 여유롭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구경해도 모자랄 만큼 수많은 작품들이 있어 나는 1층의 Egyptian art와 2층의 19-20세기 초 European paintings 위주로 돌아다닐 것을 마음 먹었다. 이집트 사원을 그대로 옮겨 놓고 물과 전시해놓은 것도 너무 멋있었고 대학생 때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현대미술 작품들을 실제로 보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계획에 없었던 곳이지만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계획에 얽매이다 못해 구속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여행도 인생도 내 뜻 대로 되지 않을 때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플랜b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내가 피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여유롭고 의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실 예상치 못한 것에서 뜻밖의 행운을 발견할 때 기분이 더 좋다!
뜻밖의 행운을 많이 만났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푸드트럭에서 5달러짜리 피자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고 유니클로 매장에 들러 장갑도 싸게 득템했고 어제 가려던 치폴레 매장을 우연히 발견해 먹은 보울도 너무 맛있었다. 4시 10분 예매해둔 탑오브더락 전망대에서는 해가 저물쯤 들어가 야경까지 볼 수 있었다.
뉴욕 시내 일대를 동서남북으로 보았다. 눈앞에 높게 솟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H&M건물부터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수많은 빌딩들. 사진으로 보다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되는 황홀함에 연신 감탄하며 손시려운 줄 모르고 핸드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어댔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말도안되는 조스피자의 웨이팅 줄을 과감히 포기하고 존스피자를 테이크아웃해서 맥주와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분명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비도 많이 왔고 우산을 쓰고 있지만 바람도 많이 불었고 전망대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렸으며 기대했던 조스피자는 또 먹지 못했다. 달라진 것은 내 마음 하나일 뿐. 지나가다가 먹고싶은 거 있으면 막 사먹고,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다 가보고. 내가 지레 겁먹었던 인종차별도 소매치기도 없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얘기한 대마냄새는 내 기준 심하지 않았고 거리에 있는 홈리스들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내 마음 하나로 바뀔 것 없는 하루가 이렇게 달라진다. 참 당연하고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데 글쓰기는 그런 마음가짐을 상기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핸드폰으로 확인해보니 오늘 29,656보를 걸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따뜻한 샤워 후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고 또 새벽2시에 깼다. 찍었던 뉴욕 사진을 구경하며 뉴욕의 마지막날을 기대해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