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실직과 같은 상황을 당하게 되면 어떨 수 없는 위기를 겪게 된다.
그것은 재정에 대한 위기도 있지만, 더 나아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혼란을 직면하는 것이다.
중장년에 실직이든, 퇴직이든 자신의 가치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은 오기 마련이다.
대체로 중년의 나이에 어떤 직장이나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면 나름의 직책이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직책이나 역할을 통해 평가를 받거나 인정을 받다 보면 자신의 가치에 대해 달리 인식할 필요를 못 느낀다.
하지만 갑자기 실직을 하는 상황이 되면서 직책과 역할이 갑자기 없어지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그 정체성의 혼란은 단지 직책이 없어지는 문제를 넘어, 남편이나 아내, 부모의 역할 등도 혼란을 겪게 된다.
사실 50대 이상이 되어서 퇴직이나 갑작스러운 실직을 하게 되었을 때 바로 터닝 포인트를 만들기 쉽지 않다.
분명한 전문직의 자격이나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으면 바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거나 방향 설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구나.’,‘나는 좋은 남편도 아니고, 좋은 가장도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올 수 있다.
일을 그만두고 어느 날 보니 가족들은 각자 다 나가고 자기만 혼자 남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이 위기는 “이사님” 혹은 “교수님”과 같은 직책으로 인해 볼 수 없었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볼 기회이다.
또한 그런 직책으로의 삶을 사느라 ‘남편’이나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 직책의 나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그 가면 뒤에 나를 마주해야 한다.
그 모습이 초라하고 형편없다고 느꼈다면, ‘일 잘하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듯 나를 세워가야 할 때이다.
나를 마주하고 나를 다시 세워가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심리 검사, 상담, 독서 등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은 직책이 아니어도 ‘괜찮은 나’로 세워가야 한다.
그 첫 단추는 이제 남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세워가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 역할을 제대로 못해 그 자리는 있지만 상대방에게 빈자리와 같이 느끼게 했다면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자녀에게 부모의 역할이나, 부모님에게 자녀의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가족 안에서 내 자리가 새로워지면 다른 일이나 역할을 감당할 버팀목이 된다.
반대로 그 관계 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엉망이 된다면 결국 새로운 인생의 방향 설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돈이나, 직책과 상관없이 주변의 사람들부터 사랑하고 서로 귀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돈이나 근사한 직책이 없어도 여전히 나를 귀히 여겨주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도 돈이나 직책과 상관없이 같이 마음을 나누고 섬기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실직이나 퇴직 이후의 위기는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100세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중장년에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그 터닝포인트는 단지 직장이나 직업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진짜 직책의 가면 뒤에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의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내 인생이 담겨 있고, 내 마음의 얼굴이 드러난다.
지금이 나에게는 ‘남편’으로, 혹은 ‘아버지’로 제대로 살지 못한 나를 마주하는 쉽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그것을 돌아볼 기회와 시간을 갖게 된 것은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 인생에 진짜 소중한 가치는 연봉을 많이 받던 그 직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나 남편에게, 자녀에게, 가까이서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공허하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에게 여전히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어쩌면 더 풍성하고 만족하며 살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끝까지 가면을 쓴 채 살려고 하면 더 공허하고 추해질 수밖에 없다.
인생에 이 시간을 한 번쯤 피할 수 없다면 남은 평생 자기 스스로에게도 만족스러운 가치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를 직시하고 다시 세워가는 출발선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