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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함으로 각박함 이기라

성과주의와 이기주의를 이기는 힘

by 동그라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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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함으로 각박함 이기라


이제는 같은 아파트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도 모른 채 사는 건 일상이다.

요즘 이웃 간에 층간 소음이나 주차 시비가 다툼을 넘어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극단적 선택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그 이면에 댓글등에 의한 인격 살인이 적지 않다.



점점 더 세상이 편리해진다고 하지만 그보다 각박해지고 관대함은 사라지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사회생활에까지 사람들이 그토록 공정에 예민한 것도 각박함의 단면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식당이나 같은 업종에 가게가 즐비한데 경쟁을 넘어 서로 고발을 일삼으며 공멸하기도 한다.


관대함이 전혀 없는 각박한 세상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가 먼저 관대하지 못할까?

관대하면 손해 보는 것이고 지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모두가 이 질문에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메마르고 각박하다 못해 황폐해지지 않겠나?

어떻게 관대함으로 우리를 메마르고 각박하게 하는 것을 이길 수 있을까?


성과주의와 성공주의를 관대함으로 이기라


‘성과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이루어 낸 결과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는 태도나 경향.’이다.

이러한 성과주의는 세대와 분야를 넘어서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대부분의 세상 조직은 성과를 요구하고, 성과에 따라 평가하고, 성과를 내는 사람이 우대를 받는다.

모두가 성과에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그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고, 또 남을 착취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성과와 성공에 집착하는 리더라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절대 관대하기 어렵다.


관대함은 성과와 상관없이 서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리더는 매일 결과로 평가받는 '승부의 세계'에 산다. 하지만 리더는 따르는 사람을 무조건 승부와 생존경쟁에 내몰기보다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한 인내는 리더가 스스로 먼저 헌신하고 성과 자체보다 함께 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일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리더를 통해 동기부여가 일어날 때 그 조직은 각자가 더 능력을 발휘하며 성과를 내게 되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서로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함께 더 큰 성과를 내는 것이다.

결국 내 성과와 내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 관대할 수 없고 결국 더 각박하고 메마르게 하는 사람이다.


이기주의와 자기만족을 관대함으로 이기라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며, 타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념’이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타인의 불편함이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상관하지 않는다.

개인주의(個人主義)는 이기주의와는 다른데 ‘개인주의’는 내가 존중받기 원하는 만큼 남도 존중함에서 나온다.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타인의 이익을 희생시키기보다 타인에게 불편이나 손해를 주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현재 우리 사회를 보면 개인주의가 성숙하기보다는 이기주의가 만연해가는 것을 본다.

사실 개인주의가 성숙한 사회가 되면 층간소음이나 주차시비로 얼굴 붉히고 다투는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만족이 우선인 이기주의가 만연하면 서로 갈등은 커지고 모두가 각박함과 메마름을 느끼게 된다.

이기주의가 만연할수록 사람들은 평가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를 존중해 주는 것에 목마르게 된다.

관대하면 자기만족이나 자신의 이익은 무조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관대한 사람은 내가 조금 손해를 봐도 다른 사람이 만족할 때 자기도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이 존중받을 때 그것으로 자기도 행복할 줄 아는 진짜 만족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나와 내가 있는 곳에 관대함의 생수가 흐르게 하라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가 숲을 이루며 자라는 곳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이 공급되지 않고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은 결국 사막이 되고 생명이 살 수 없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과 관대함은 사람이 꽃피고 자라게 하는 물과 같다.


가정에서든, 학교나 사회에서든 그 물이 없는 곳에서는 성장도 성숙도 없이 메말라간다.

사막에 생명력 강한 잡목이 몇 개 살아남아도 그곳은 이미 버려진 땅이 된다.

어떤 사람은 숲을 이룰 만큼 물이 흐르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숲도 사막으로 바꿔버린다.

성과에 집착하고 자기만족이 우선인 이기주의가 가득한 사람이 모인 곳은 결국 사막으로 변한다.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을 존중하기에 내가 먼저 헌신하고 그들과 함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국 사막 같이 황폐하던 곳에도 생수 같은 물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꽃이 피고 열매가 자라며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세상이 각박하고 메말라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사막같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과주의와 이기주의에 메마르다 못해 생명력을 잃고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풍성한 곳을 찾아다니며 또 그곳도 메마르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메마른 곳에서 내 안에서 흐르는 생수를 통해 황폐한 곳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관대함은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아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온다.

그 존귀함으로 인해 내가 누리는 참된 마음의 만족이 가득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온다.

메마른 땅을 생명이 풍성한 땅으로 바꿀 관대함이 흐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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