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소울푸드 순대국

by 동그라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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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소울푸드 순대국



1989년, 대학교 3학년 여름은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시간이었다.

지금에는 너무도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1988년까지만 해도 나라의 허가가 없이 갈 수 없었다.

88년 올림픽 이후 89년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었을 때 여름방학 여름 배낭여행 1세대가 되었다.

4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영어를 더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어 저녁마다 영어학원을 다녔다.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이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학원으로 가 수업을 듣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처음에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먹고 가기도 했지만 종로에 가서 저녁을 먹을만한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학원 건너편 골목에 있었던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순대국밥집에 갔다.

그 집은 식사 메뉴는 순대국밥과 콩비지 찌개 두 가지였고, 전을 파는 집이기도 했다.

처음 가서 순대국을 먹는데 일반 순대가 아닌 전통 순대로 만든 순대국으로 요즘 표현대로 취향저격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거의 매일 가서 순대국을 시켜 먹었더니, 어느 날부터 가면 할머니께서 뭘 먹을 거냐고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어 왔냐.”하시면서 일반보다 순대를 훨씬 많이 넣어서 순대국을 내어 주셨다.

거의 1년간 영어학원을 다니는 동안 일주일에 2~3번은 순대국을 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인생에 순대국은 지금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거나, 혼자 식사를 할 때 종종 먹게 된다.


돼지뼈를 푹 고아 우려낸 사골 국물에 순대, 돼지 머리 고기, 염통과 돼지 밥통(오소리감투), 소창, 대창 등 각종 내장류를 넣고 다시 한번 끓여 만든 국밥을 말한다.

경제 성장기의 한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소울푸드로 통했다. 설렁탕도 사 먹기 쉽지 않은 형편이라도 사골 국물과 고기 건더기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외식거리로는 아직도 순대국밥이 부동의 1위다.

찾아보면 순대국밥집은 근처 김밥집만큼이나 흔하고, 요즘은 그 수가 많이 줄어든 중국집보다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순대국밥집이 많다는 것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고기와 고깃국을 먹었다는 만족감을 주는 가성비 최고의 한 끼이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에 오래간만에 순대국을 맛있게 먹었다.

내 앞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펄펄 끓고 있던 순대국을 먹으며 35년 전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 당시 배운 영어를 가지고 해외 생활을 8년을 했으니, 순대국은 나에게 영어에 대한 투자이기도 했다.

지금도 순대국을 먹을 때면 저녁마다 순대국집 할머니께서 “어 왔냐.”하시며 떠주신 순대국이 기억난다.

그 할머니의 마음이 있었기에 학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학생 시절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을 때 가장 만족스럽게 한 끼가 종로에 할머니 순대국이었다.

그런 마음이 담긴 음식이 지금도 수많은 미생들에게 꿈을 잃지 않고 힘과 용기를 주는 소울 푸드가 될 것이다.

오늘 순대국을 먹으면서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 소울 푸드는 할머니 순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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