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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만 길이 아니다 (4)

새로운 도전, 흑백 요리사

by 동그라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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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만 길이 아니다 (4)


제4부: 새로운 도전, 흑백 요리사


2023년 가을, 서울.

한국으로 돌아온 영훈은 부모님 집에 잠시 머물렀다. 파리에서 번 돈은 거의 남지 않았다. 생활비와 학비로 다 썼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몇몇 프랜치 레스토랑 세프 제안이 있었지만 영훈은 일단 정중히 거절했다.

"영훈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영훈은 단순히 월급을 많이 준다는 식당의 셰프가 되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요리를 처음 시작하게 된 초심을 잃지 않고 정말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요리를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하는 길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고민 중이었다.

사실 자신만의 요리를 선보일 식당을 오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더 이상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자신이 배운 프랑스 요리를 어떻게 한식을 통해 선보일지를 구상 중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흑백요리사 시즌 3' 참가자 모집 공고가 나왔다.

"국내 최고의 요리 경연. 우승 상금 3억."

영훈의 눈이 빛났다. 이거다.

단순히 상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훈은 자신의 요리 철학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위로의 요리를.

영훈은 지원서를 작성했다. 지원 동기란에 이렇게 썼다.

'저는 프랑스에서 미슐랭 레스토랑 경력을 쌓았지만, 진짜 요리는 한국에 있다고 믿습니다. 할머니의 김치찌개처럼,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밥을 만들고 싶습니다.'


3주 후, 합격 통보.

"김영훈 씨, 흑백요리사 시즌 3 본선에 진출하셨습니다."

영훈의 손이 떨렸다. 드디어 시작이다.

첫 촬영 날, 영훈은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다. 유명 셰프들, 호텔 총 주방장들, SNS 스타 셰프들.

영훈은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저기 저 사람, 파리에서 왔다던데?"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이래."

주변의 수군거림이 들렸지만, 영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요리에 집중했다.

첫 번째 미션: "당신의 시그니처 요리"

영훈은 망설임 없이 김치찌개를 선택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놀라워했다.

"김치찌개? 흑백요리사에서?"

"너무 평범한 거 아냐?"

하지만 영훈의 김치찌개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배운 콩소메 기법을 활용했다. 묵은지, 돼지 목살, 무, 대파를 12시간 동안 천천히 우려내 깊고 맑은 육수를 만들었다. 거기에 발효된 된장과 고춧가루를 더해 깊이를 더했다.

플레이팅도 달랐다. 전통 뚝배기가 아니라, 하얀 접시 위에 예술 작품처럼 담았다. 돼지고기는 바삭하게 튀겨 크루통처럼 올렸고, 묵은지는 가늘게 채 썰어 탑처럼 쌓았다. 그 위에 푸른 쪽파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심사위원들이 숟가락을 들었다.

한 숟갈.

심사위원 중 한 명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한 숟갈.

"이건 그냥 김치찌개가 아니네요. 신선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습니다."

심사위원장이 영훈을 바라봤다.

"이 요리에는 어떤 서사가 느껴집니다. 단순한 맛이 아니라, 맛 이상에 무언가가 담겨 있어요. 김영훈 씨, 이 요리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영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네.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저를 살린 음식이 할머니 백반집의 김치찌개였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진짜 요리는 화려한 재료나 기술이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마음이라는 것을요."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심사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요리는 합격입니다. 아니, 합격 이상입니다."


두 번째 미션: "팀 배틀"

영훈은 흑팀에 배정되었다. 팀장은 중식의 대가 황민욱 셰프였다. 미슐랭 2 스타 출신의 거장이었다.

"영훈 씨, 반갑습니다. 파리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민욱은 영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영훈은 정중히 받았다.

"영광입니다, 셰프님."

팀 미션은 '단체 급식 100인분 만들기'였다. 시간은 3시간.

황민욱이 전략을 짰다. "우리는 중식으로 갑니다. 짜장면, 탕수육, 볶음밥. 빠르고 확실하게."

영훈도 동의했다. 대량 조리에서는 중식만 한 게 없었다.

3시간 동안 주방은 전쟁터였다. 불이 치솟고, 기름이 튀고, 셰프들이 고함을 질렀다.

영훈은 볶음밥 담당이었다. 100인분의 볶음밥.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훈은 파리에서 배운 효율적인 동선과 한국에서의 빠른 손놀림을 결합했다.

"영훈! 볶음밥 10분 안에 마무리해줘요!"

"알겠습니다!"

땀이 눈에 들어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영훈은 계속 볶았다.

시간 종료 5분 전, 마지막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완성!"

흑팀은 환호했다.

결과는 흑팀의 승리. 백팀보다 맛, 속도, 완성도 모두 앞섰다.

황민욱이 영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어요, 영훈 씨. 당신 덕분에 이겼습니다."

영훈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팀워크 덕분입니다."

토너먼트가 계속되었다.

영훈은 매 라운드마다 한식을 재해석한 요리를 선보였다.

된장을 베이스로 한 크림 리소토

불고기를 활용한 웰링턴 스테이크

파스타 스타일을 응용한 잡채

심사위원들은 매번 감탄했다.

"이건 한식인가요, 양식인가요?"

"둘 다입니다. 경계가 없습니다."

영훈의 요리 철학은 명확했다. 기술은 서양에서 배웠지만, 정신은 한국에 있다.


마침내 결승전.

영훈의 상대는 황민욱 셰프였다. 중식의 대가이자, 미슐랭 2 스타의 명성을 가진 거장.

방송 전,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마주쳤다.

"영훈 씨, 결승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요, 셰프님."

황민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경기에서는 봐줄 수 없어요.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영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승전 촬영 전날 밤, 영훈은 할머니 백반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백반집은 여전히 문이 닫혀 있었다. '몸이 불편하여 당분간 쉽니다'라는 팻말은 그대로였다. 팻말은 바래서 글씨가 흐릿했다.

영훈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적었다.

'할머니, 저 영훈이에요. 할머니 덕분에 요리사가 되었고, 이제 꿈의 무대 결승에 섭니다. 할머니의 김치찌개 정신을 잊지 않고 요리할게요. 꼭 다시 뵙고 싶어요.'

쪽지를 문틈에 끼워 넣고, 영훈은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할머니, 건강하시죠?'

영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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