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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 소설
09화
거기만 길이 아니다 (3)
프랑스, 새로운 길을 향한 도전
by
동그라미 원
Oct 30. 2025
거기만 길이 아니다 (3)
제3부: 프랑스, 새로운 길을 향한 도전
3년 후, 2019년. 영훈은 인천공항 출국장에 섰다. 손에는 낡은 캐리어와 프랑스행 항공권이 들려 있었다.
국내 요리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후, 영훈은 결심했다. 진짜 실력을 갈고닦으려면 프랑스로 가야 한다고.
"영훈아, 몸 조심하고."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영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네, 아빠. 잘 다녀올게요."
공항을 떠나기 전, 영훈은 마지막으로 할머니 백반집에 들렀다. 할머니에게 상금 봉투를 전했다.
"할머니, 이거 받아주세요. 할머니 덕분에 받은 상이예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네 거야. 네가 노력해서 받은 거지."
"그래도요..."
"됐어. 그 돈 가지고 프랑스 가서 더 공부해. 그리고 꼭 성공해서 돌아와."
영훈은 할머니를 꼭 껴안았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파리. 도착한 첫날, 영훈은 현실의 벽을 마주했다.
숙소는 6층 다락방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매일 계단을 올라야 했다.
방은 좁고 습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요리 학교는 더 가혹했다.
"Non! 이건 틀렸어요. 다시."
프랑스인 강사는 영훈의 요리를 보고 혀를 찼다. 소스가 너무 짜다는 이유였다.
영훈은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싱겁다고 했다.
"동양인들은 미각이 둔해서 그래. 소금 조절을 못 해."
강사의 말에 주변 학생들이 웃었다. 영훈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참았다.
낮에는 학교에서 배우고, 밤에는 한인타운의 허름한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시급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파리의 물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느 날 밤,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깨뜨렸다.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거 네 월급에서 까야겠어!"
"죄송합니다..."
"이것들이 프랑스 와서 돈 벌겠다고 설치더니, 일도 제대로 못 하네."
영훈은 고개를 숙인 채 깨진 접시를 주웠다. 손가락이 베였다. 피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날 밤, 좁은 다락방에 돌아온 영훈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지.'
포기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할머니 백반집에서 찍은 사진. 김치찌개 사진. 할머니의 미소.
'나는 허영심을 위해 요리하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전하는 밥을 만들 것이다.'
영훈은 다시 일어났다. 베인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노트를 펼쳤다. 오늘 배운 것들을 복습했다.
1년이 지났다.
영훈의 프랑스어는 유창해졌고, 칼질은 더욱 정교해졌다. 학교 강사들도 영훈의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영훈, 네 요리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 기술만이 아니라... 감정이 담겨 있어."
영훈은 서양 요리의 기술과 섬세함을 배우되, 자신의 뿌리인 한식의 '정(情)'과 '위로'라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학교 졸업 작품으로 영훈은 '한식을 재해석한 코스 요리'를 선보였다.
된장을 베이스로 한 크림수프, 김치를 곁들인 돼지고기 콩피, 고추장 소스를 입힌 양고기 로스트.
심사위원들은 놀라워했다.
"이건... 프랑스 요리인가, 한식인가?"
"둘 다입니다. 프랑스 기술로 한국의 맛을 표현했습니다."
영훈은 최우수 졸업생으로 선발되었다.
졸업 후, 영훈은 파리 6구에 있는 미슐랭 1 스타 레스토랑 '르 봉 구스또(Le Bon Goût)'에 셰프로 합류했다.
첫 출근날, 주방장 피에르가 영훈을 바라봤다.
"동양인 셰프는 처음이야. 기대하지."
하지만 주방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다른 셰프들은 영훈을 경계했다.
"저 동양인이 뭘 안다고."
"프랑스 요리를 배운 게 고작 2년인데."
영훈은 말 대신 요리로 증명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재료를 손질하고, 메뉴를 연구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영훈의 요리를 먹고 피에르를 불렀다.
"셰프, 이 요리 누가 만들었죠? 정말 감동적이에요."
"아, 새로 온 한국인 셰프가 만들었습니다."
"꼭 인사하고 싶은데요."
피에르는 영훈을 불렀다. 손님은 영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의 요리에는 영혼이 담겨 있어요. 미슐랭 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날 이후, 주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른 셰프들도 영훈을 동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2년이 더 지났다. 2022년. '르 봉 구스또'는 미슐랭 2 스타로 승격되었다. 영훈의 역할이 컸다.
영훈은 이제 파리 요리계에서 '떠오르는 동양인 셰프'로 불렸다.
프랑스 요리 잡지에 인터뷰가 실렸고, 여러 레스토랑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어느 날, 영훈은 VIP 손님을 위한 특별 메뉴를 준비했다. 캐비어, 송로버섯, 랍스터. 최고급 재료들이었다.
요리를 완성하고, 플레이팅을 마쳤다. 완벽했다. 예술 작품 같았다.
하지만 영훈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요리인가?'
화려한 캐비어가 할머니의 김치찌개만큼 누군가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을까?
그날 밤, 영훈은 좁은 원룸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신라면이었다.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맛이야.'
영훈은 울컥했다. 파리에서의 성공이 무색하게, 그가 진짜 그리운 것은 한국의 소박한 맛이었다.
다음 날, 영훈은 피에르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왜? 여기서 계속 일하면 미슐랭 3 스타도 가능해."
"제 길은 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피에르는 아쉬워했지만, 이해했다.
"너는 언제나 한국 요리사였어. 프랑스 기술을 빌렸을 뿐이지. 가서 네 길을 걸어."
영훈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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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2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살면서 깨닫고 어려움을 극복한 마음들을 글을 통해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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