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이스 힐링(1)

한 줄의 문자

by 동그라미 원


자영7.png


보이스 힐링 1

1부. 한 줄의 문자



2023년 11월, 밤 11시 47분.

어둠이 짙게 깔린 한강 다리 위. 스물아홉의 자영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차가운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11월 말의 한강은 매섭고 냉정했다. 하지만 자영의 마음은 그보다 더 차가웠다.

세상은 때론 성실하게 살아보려는 자들에게 더 가혹해 보인다.

젊어서는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면 된다고 하지만 꿈꿀수록 현실은 더 냉정하다.

자영은 오늘도 잠들었다가 다시 내일 아침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2년.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었던 어머니를 잃은 뒤, 자영은 혼자였다. 아버지는 자영이 다섯 살 때 집을 나갔고,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온 작은 전셋집이 자영에게는 전부였다.

그런데 그마저 사라졌다.

2억 원짜리 전세 사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집주인이 여러 명에게 중복으로 전세 계약을 맺고 도주한 것이었다. 자영은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과 자신이 몇 년간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은행 대출까지 합쳐 겨우 마련한 전세금을 통째로 날렸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자영은 주머니에서 작은 사진 하나를 꺼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어머니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자영은 그 미소가 너무 아팠다.

'딸아,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자영은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할 자격도, 살아갈 이유도 없다고 느꼈다.

난간 너머를 보았다. 강물은 검고 깊었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자.'

자영은 난간 위로 한 발을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윙윙."

자영은 멈칫했다. 누가 이 시간에? 어차피 자신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들도, 직장 동료들도, 모두 바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해 보자.

자영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문자 알림이었다.

발신자 표시는 없었다. 하지만 문자 내용이 자영의 심장을 멎게 했다.

'자영님, 지금 죽고 싶을 만큼 힘드시죠? 이 번호로 전화 주시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전화 주세요.'

자영은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누구지?'

스팸인가? 하지만 '자영님'이라니.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드시죠?'라는 문장. 마치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한강 다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자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CCTV?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자가 자영의 마음에 작은 균열을 냈다.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자영은 난간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으로 누군지 확인해 보자.'

"뚜루루, 뚜루루..."

수화기 너머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자영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연결되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음악이었다.

"Stay 내 눈물이 마를 때까지 Stay 내가 나를 모를 때까지 Stay 아주 조금만 기다려 "

넬(Nell)의 'Stay'.

자영의 손이 떨렸다. 이 노래. 이 노래는...

자영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사를 했고, 전학하면서 왕따를 당했다.

당장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친구도 없었다.

그때 점심시간에도 혼자 운동장 구석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음악을 듣곤 했다.

그때 자주 들었고, 듣고 있으면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넬(Nell)의 'Stay'였다.


고등학생 때,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날도, 혼자 이 음악을 들으며 울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함께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머니도 말보다 나와 함께 음악을 들어주는 것을 통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 그만두고 싶다고 울던 날도, 어머니와 함께 이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날 밤, 어머니는 자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영아, 엄마도 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도 좋아서 다행이다. 좋은 노래 있으면 또 소개해 줘."

"흐윽..."

자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 어머니예요?"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노래만 흘러나왔다.

"(조금의) 조금의 (따뜻함) 따뜻함 (이라도)이라도 간직할 수 있게 해 줘 난 이미 얼어버릴 듯 한없이 차가워 "

자영은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느끼다가, 점점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난간에서 물러나 바닥에 앉은 채, 자영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내가 엄마 돈을 다 날렸어요. 내가 바보야..."

하지만 노래는 계속 흘렀다.

"(너마저) 너마저 (떠나면) 떠나면 "

그 노래 가사가 자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엄마, 엄마도 없으니 너무 힘들어요.”

자영은 얼마나 울었을까. 노래가 끝나고, 다시 처음부터 반복되기 시작했을 때, 자영은 천천히 일어났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자영은 난간을 바라봤다. 아까는 그렇게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무서웠다.

'나, 살고 싶은 건가?'

자영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통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고, 노래는 계속 흘렀다.

"고마워요..."

자영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감사했다.

전화를 끊고, 자영은 다리를 걸어 내려왔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자영은 죽지 않았다.

keyword
이전 13화거기만 길이 아니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