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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Sep 07. 2019

문학적 건망증


책꽂이 구석에 시선이 머무른다. 거기 무엇이 있는가? 아 그렇다, 세 권으로 된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 언젠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었었다. 지금 나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무것도 모른다. 다음 칸 책꽂이 모퉁이에는 30년 전쟁에 대한 기록을 모아 놓은 편찬서 몇 권이 있다. 그중에는 5백 페이지짜리 베로니카 웨지우드의 것과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골로 만의 「발렌슈타인」도 있다. 나는 꼼꼼하게 모조리 다 읽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30년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문학적 건망증>


<문학적 건망증>에서 저자는 직접 글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일단 주제가 특이하고 흥미로우면서도 읽으며 위안도 됐다. 저자같은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한때는 이 건망증이 무서워서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활자를 발췌하고 메모하며 기억력 훈련을 쌓으려 했다. 인상 깊은 구절 사진도 찍어놓고.. (물론 나중에 보진 않음) 특히나 비문학은 더 그랬다. 책에 모든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언갈 자꾸 얻고 남기려 했다.


어느 때부턴가 체득한 느낌과 달라진 시야는 확실히 남아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집착을 놓게 되었다. 또한 모든 활자를 받아들이진 못해도 강박에서 벗어나 나에게 와 닿는 부분부터 물꼬를 터서 책을 이해하는 방식이 적합하다 느끼고 있다. 어차피 재미를 위해 읽는 건데 그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면 무슨 소용일까 싶다. 세상엔 수많은 책이 넘쳐나고 읽고 싶은 것들이 쌓여있는데 굳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꾸역꾸역 붙잡고 싶진 않다. 그렇게 읽다 보면 문득 과거에 읽었던 책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실마리를 풀기도 하고.. 생각의 파편들이 이어진다. 확실히 뭔가 쌓이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이게 알게 모르게 행동과 일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겠지.



또한 문학을 읽는 것 자체가 나와는 다른 삶을 향한 관심이다. 타인을 향한 포용과 이해의 경계까지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자유의 범주이며 사유의 건강도이다. 스스로를 재단하지 않는 사람은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는다. 타인을 재단하려 드는 자는 화살은 결국 스스로에게로 돌아온다 생각한다. <타자의 추방>의 저자는 현재 정치와 경제는 관심을 에고로 이끌고, 이런 관심을 자기생산에 기여한다 말한다.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타자는 나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거울로 전락한다. 나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의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서로의 쇼윈도'라는 표현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문학은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아닐까 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의 상황에 몰입하게 되고, 굳건한 자아를 부수고 타자의 부정성을 껴안을 폭이 넓어진다. 겉으로만 봤을 땐 쟤 왜 저러나 생각했을지 모를 편협한 시각의 폭을 넓혀준다. 나도 상처받기 두려워 안전과 내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편이다.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이 건강한 자아의 전제다. 내겐 없는 타자의 부정성을 마주하며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는… 해야…, 너는… 해야….」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씌어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이었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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