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 후 학교 생활은 그야말로 ‘헬’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가 이 일을 왜 시작했나’하는 자책이 들었고 일년을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듬이 깨진 몸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있는 공부량이 아니었다. 북핵 문제와 거시 경제, 4차 산업 혁명과 자율주행차까지 전 세계 모든 시사 상식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다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깊은 관심이 없던 나는 그 모든 것을 따라 잡기가 무척이나 버거웠다. 공부를 하고 또 해도 새로운 지식이 흘러 넘쳐났다. 미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흔 넘은 나이에 회사에 들어가 인하우스 통역사로 경력을 쌓은 다음 다시 프리랜서 세계로 입문하기에는 출발이 너무 늦기도 했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다시는 조직 사회에 들어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죽이며 더는 소모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발을 이미 담군 것, 돌이키기에는 이미 출발선에서 한참 멀어진 터라 어쨌든 과거와 현재의 점들을 강력하게 이어나가야 했다. 뒤돌아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라디오 진행을 하며 발견한 것은 내가 진행에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문 지식으로 말할라 치면 잘 나가는 통역사 수준만큼은 되지 못했지만 어렵고 고된 통역 학문을 공부하며 웬만한 기본 지식은 다 꿰고 있는 터였다. 매 시간 어려운 주제들과 씨름하며 시간과 건강을 갈아낸 학업 결과는 대학원 진학 이전보다 훨씬 유창한 영어 능력을 갖게 해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 이 모든 점들이 이어지는 궁극의 포지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통역의 세계를 겉으로나마 핥으며 모든 통역이 행해지는 자리에 전문 통역사 외에도 전문 진행자, 즉 국제 행사 MC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 이거야!’
돌고 돌아 온 길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곳에 내 인생을 걸어보고 싶은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그간 환경과 운명 그리고 때때로 행운과 나의 부족함에 떠밀려 이전까지의 커리어가 지그재그로 이어져 왔다면, 이제는 내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걸고 죽을 만큼 해보고 싶은 분야가 생겼던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여러 가지 대학원 전공들을 뒤로 물리고 오늘 이곳에 서 있는 이유가 마치 깨달아지는 것 같았다. 2학기는 모든 에너지가 다 방전되어 그저 두 다리를 끌고 간신히 학교 수업을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띠 동갑쯤 되는 세월의 벽은 나와 내 또래의 만학도들이 더 느꼈을 터. 졸업 시험이라는 부담이 매일 우리를 짓눌렀고 범위도 주제도 정해지지 않은 수많은 연설문들을 갈고 또 갈아 내느라 뼈가 갈릴 지경이었다. 시험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했지만 체력이 너무 따라주지 않아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렇게 피를 튀기며 날이 선 채로 마지막 학업의 끈을 이어가던 우리의 전쟁 같은 시절은 마지막 졸업 시험과 함께 한 치의 미련도 두지 않고 막을 내렸다.
지쳤다. 죽기 직전까지 지친다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나의 모든 사랑스런 여가 활동들을 포기할 만큼 뼈 속까지 지쳤다. 겨우 걷고 겨우 밥을 먹고 겨우 숨 쉴 정도의 에너지만 남아 있었던 듯 하다.
그렇게 봄이 되었다. 무너진 몸으로는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한 학기는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쉬겠노라 다짐했다. 충분한 휴식으로 나에게 보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어차피 새로운 길로 나아갈 끈도 부족했다. 뭔가를 만들어야 했다.
국제 행사 MC가 될 전문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리서치에 돌입했다. 여러 사립 기관들에서 영어 아나운서 수업을 하고 있었고 수업료는 학비만큼이나 비쌌다. 이제 마지막 사다리를 놓으면 될 일 이었다. 여러 국제 행사 아나운서들의 개인 SNS도 팔로우를 했다. 그들의 행사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심기가 뒤틀렸다. 마치 내 자리를 강탈 당한 것 같은 질투심이 끓어 올랐다. 웬만해서는 누군가를 질투하는 일이 업는 내가 느끼는 순수한 속 쓰림이었다.
‘저 자리는 내 자리야!’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검색 끝에 마음을 정한 곳에 등록하기 위해서였다. 수서행 기차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 역삼역으로 향했다. 서울 공기는 여전히 살아 있는 생동감을 주었다. 잠깐의 면담과 등록을 하고 수료 후 행사 데뷔까지 책임진다는 국제 행사 MC 출신 대표의 말을 듣고 지금은 아리랑 TV 기자와 프리랜서 통역사가 된 어린 두 친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은 여러 종류의 대본을 가지고 발성, 호흡, 발음, 상황에 맞는 애드리브까지, 영어로 진행하는 모든 행사에 관한 기본기와 스킬이었다. 기운이 너무 없어 죽을 만큼 노력하지는 못했고 간신히 숙제를 이어 나가며 그렇게 석 달 간의 교육은 종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데뷔하는 것! HIT THE ROAD! 시작만 하면 될 일 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면접 불패의 주인공 아니던가? 한 달에 한 두 번 가뭄에 콩 나듯 섭외 소식이 들려 왔다. 나이 많은 언니의 화려한 프로필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통번역을 전공하고 방송 진행을 했다는 거 외에는 나이도 미모도 이미 정점을 지나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아나운서 의상을 구입해 유명하다는 청담동 스튜디오에서 프로필을 찍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금액을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미 남편이 주는 생활비 외에 내 통장 잔액은 얼마 남지 않은 동전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야만 해!’
약간의 안이한 마음과 당연히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마음을 채웠다.
많은 국제 행사가 몰리는 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본격적으로 문을 두드려 보리라 다짐했다. 방송처럼 수많은 대기자가 몰려 있는 치열한 곳이지만, 전문 프리랜서로써의 보수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행사가 많다고 해서 다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행사 경력을 요구하는 곳이 많아서 문은 조금씩 더 좁아져 갔다. 수업을 받던 에이전시의 실적도 그다지 좋지 못한 듯 했다. 행사 섭외가 들어오면 우리를 가르쳤던 선배 아나운서들이 먼저 선택되며 나와 동기들은 고배를 마시는 일이 늘어갔다. 그 가을 석 달간 기껏해야 네 다섯 군데 지원을 한 것 같다. 좋은 소식을 들려준 곳은 없었다.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내가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입 장벽이란 걸 실감했다. 인생의 프라임 타임에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겨울이 지나고 이제는 마흔 초반의 나이가 슬슬 문을 닫을 무렵 자신감도 함께 꺾여 갔다. 문득문득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나에 대한 건지 신에 대한 건지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서러움이 되어 밀려 왔다. 학교를 다니며 망가졌던 몸 상태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인생의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었다. 그 겨울 깊은 생각과 침체에 빠졌다. 흐르는 시간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해 겨울은 거의 동면 모드였다. 먹고 자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머리 속에서는 그래 딱 일년 만 더, 내년 한번만 더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게 겨울의 눈부신 햇살을 가슴에 품고 잠이 들었다.
시간은 돌고 돌아 봄이 되었다. 운동으로 체력을 회복해보고자 했지만 이제 몸은 나의 강한 의지로 이겨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걷는 시간이 삼십 분이라도 넘을라치면 호흡이 가빠왔고 희끗한 머리와 늘어지는 불살은 내 마음을 더 늘어 뜨리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나 뒤는 없었다. 장장 4년의 시간을 하던 일을 단절한 채 내 인생의 사활을 걸고 새로운 길에 몰두해왔기 때문에 대구 포항을 오가며 들였던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시간에 상응하는 비용을 이전과 같은 보잘 것 없는 방법으로 보상받고 싶지가 않았다.
‘봄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봄을 맞았다. 통장의 잔고가 더는 이대로 있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의 사인을 주었다. 내가 서울이 아니라 대구에 와있음이 후회가 되었다. 기회의 문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대학교 출강을 주선하던 에이전시에서 집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대 토익 수업을 의뢰해왔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니었지만 지난 4년을 보상 받기에 충분한 일도 아니어서 아르바이트 삼아 다시 시작했다. 어차피 행사 의뢰는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기 때문에 목을 빼어 그 기회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다른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시작은 수업은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냥 시간당 수업료를 받는 내게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기회를 내가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이 시간을 살아 내자고 다짐했다. 간간히 번역 의뢰도 들어 왔다. 번역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품성을 높일 수 있는 예술 활동에 가깝지만 그런 번역이 높이 대우 받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투자되어 오랜 동안 업계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번역 보수가 성에 차지 않았다. 매달릴라 치면 밤을 새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스타일이었지만, 결과물의 수준이 높다 해도 번역료는 큰 차이가 없었기 어정쩡한 분야를 확장해 더는 내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집중의 시간은 이어졌다. 서울행 기차를 타고 다시 강남으로 가 프로필 사진을 찍고 홍보 동영상을 촬영했다. 별달리 더해진 이력은 없었지만 프로필을 수정하고 가뭄에 콩 나는 듯한 섭외였지만 토익 수업 일정과 겹치지 않는 행사는 계속해서 지원했다. 지원한다고 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행사 진행자 모집 공고가 뜨면 여러 에이전시에 섭외 의뢰가 가고 또 에이전시는 각 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진행자에게 포워드 하면 그 수십 명 중 다시 원하는 지원자가 지원하는 방식이라 그 경쟁률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적어도 1대 수십 명은 족히 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온 몸의 있는 힘을 다 쥐어짜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 위해 두드리고 노력하였지만 그 해에도 좀처럼 높은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 마음에 시험이 몰려왔다. 왜냐하면 나는 시간 여행자, 그 중에서도 젊음이라는 시간을 다 써버린, 가능한 시간의 마지막 동아줄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열망한 일이 없었다. 이토록 간절하게 쏟아 부은 일이 없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 나를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12월, 춥고 앙상한 겨울 나무가 그 가지를 드러내자 간신히 뼈만 남은 앙상한 내 마음도 드러났다. 과거에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잡았던 모든 기회들이 내 젊음과 무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속 깊은 심연에서는 될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리라는 울림이 들려 왔지만, 마흔을 넘어 죽을 힘을 달려 온 성과 없는 그 겨울의 현재는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더 두드릴 의욕마저 상실하게 했다.
‘내년에 진짜 몇 번만 더 해보고 관둘 거야.’
울분에 찬 다짐이 이어지고 무너지기를 수십 번도 더 반복하면서 그 해 겨울은 끝이 났다. 눈물이 피부를 짓이기도록 서럽게 우는 날이 많아졌다. 내 안에 있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집스러운 자아가 나를 더 해치고 있는 듯 했다. 사다리가 있다면 하늘로 올라가 신의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힘든 겨울이 오고 스스로를 위안하려 콧바람이 시큰거리도록 이름 없는 거리를 쏘다니고 싶은 마음에 상하이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묘한 매력의 도시였거니와 집 근처 공항에서 훌쩍 갈 수 있다는 이유로 비행기 표를 끊고 호텔 사이트를 뒤적였다. 호텔 결재를 차일 피일 미루던 중에 뉴스에서 암울한 소식이 들려 왔다.
중국 우한 발 코로나가 겉잡을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결재한 항공권을 취소하고 다시 이불 속을 파고 들었다. 집 앞 강변 쓸쓸한 거리가 그 날 따라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꿈과 희망을 모두 잃어 갈 곳 없는 겨울 철새처럼 내 마음도 더 시려 갔다. 마음이 무너지자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던 몸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무겁고 두렵던 코로나 소식과 함께 내 삶에 드리웠던 한 줄기 희망도 자취를 감춘 듯 했다. 절망감이 밀려 왔다. 더는 아무것도 붙잡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봄은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