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을 당겨본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줄을 지나치게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자칫 끊어질 수 있고요,
설령 끊어질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세게 당겼다 놓으면, 줄은 어김없이 탄력을 잃은 채 곧 느슨해 져버리고 맙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여서요,
적당한 긴장함은 일상에 탄력을 줄 수 있지만,
그것도 팽팽한 고무줄 마냥 지나치면 탄력성을 회복하기 힘들게 되죠.
주중엔 열심히 일하더라도
주말엔 나 자신을 놔버린 것처럼 무조건 쉬는 일,
일상 속에서 탄력성을 키우는 첫 걸음, 아닐까 싶네요.
‘도로의 주인공은 보행자-ㅂ니다’!
여기는 ‘네 시의 음악여행’, 저는 윤디, 정성윤이에요.
시그널이 울리고 스튜디오 유리창 위로 ‘온 에어’가 켜지면 멘트가 시작된다.
’여기는 네 시의 음악 여행'
대구로 내려와 대학교 토익 출강 수업을 나가며 어영부영하며 나의 삼십 대는 모두 지나갔다. 아이는 없었지만 삶의 기반을 마련했고 다시 정이 붙을 것 같지 않던 대구가 이제는 따뜻한 고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 무렵, 마흔이 가까워오는 인생의 중반기에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내내 대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당시에 내가 흥미를 갖고 있던 분야는 진로 적성 분야였는데, 그 분야 전문 대학원이 천안에 있어 지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1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후 예전에 테솔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승무원 출신 동생에게 언니의 적성을 살려 성균관대 언론 정보 대학원에 원서를 내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울로 수업을 들으러 가는 가끔의 일탈이 유익할 것도 같았고 관련 분야에 흥미도 있는 터여서 이듬 해 봄 학기 모집에 나는 원서를 냈더랬다. 서류 접수 후 무사히 면접을 마치고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나에게 전공을 추천해 주었던 동생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논문을 완료하고 졸업을 앞둔 그녀는 그 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걸 후회한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많은 방송 언론사 관계자들과 인맥을 트게 되었지만, 실상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그 전공이 도움이 될지 의문스럽다는 거였다. 들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입학금과 등록금까지 마련해 두었음에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신조는 자고로 배워서 투자한 금액이 아깝지 않게 열 배 스무 배 활용하자는 주의여서 일주일 고심 끝에 합격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고 전공을 향한 나의 고민은 새롭게 시작됐다. 그렇게 아까운 1년의 시간을 보내고 토익 수업을 하며 알게 된 우경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일상다반사에 관한 실컷 수다를 떨고 헤어지려던 찰나, 우연한 얘기 중에 지인이 한동대 통번역 대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통번역!'
나의 업무 분야와도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아 돌아서 헤어져 오자마자 나는 각종 정보들을 긁어 모았다.
'이거였다!'
드디어 마침내 돌고 돌아 나의 잃어버린 전공을 만난 느낌이랄까?
어학 수준이 대단히 훌륭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말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매우 적합한 학문이라 생각되어 ‘이거, 재밌겠는걸’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지원한 나의 대학원 생활은 약간의 흥미를 동반한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함께 1년 후 잠시 막을 내렸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운 좋게 합격한 자가 치러야 할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해보지 않은 사람을 말할 수 없는 극한의 학업 스트레스, 그 가운데 너무도 나약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년을 더 하고 운이 좋아 졸업 시험을 패스하면 끝은 날 터였지만, 이대로 밀어 붙이다가는 몸도 마음도 너무 망가질 것 같아 내 스스로 잠시 휴지기를 가지기로 한 것이다.
쉬는 기간 동안 빈틈 없이 보충하며 통역에 필요한 모든 사회 이슈를 독파하리라 마음 먹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시작된 휴학 생활은 한 마디로 몸과의 사투였는데, 지난 1년 간 대구 포항 간을 주 5간 왕복하며 각종 전문 분야의 되지도 않는 통역을 쥐어 짜며 해내느라 온 몸이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하루 중 일어나 식사를 하고 장을 보러 가는 시간 말고는 오로지 몸을 돌보는데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다시 다른 계절로 접어 들며 별다른 회복의 성과를 남기지 않은 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 들 무렵,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다. 물론 통역 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되었지만 너무 어려운 콘텐츠들로 인해 지난 일년 간 신물이 날 대로 난 머리는 쉽사리 다시 학업의 끈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학생들은 다시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규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우경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일상의 수다로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신앙과 우리들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언니도 라디오 디제이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며, 지금 TBN 교통 방송에서 라디오 진행자를 모집하고 있으니 한번 원서를 넣어 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그녀는 정말 나에게 귀인이다).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그녀가 박사 과정 대학원생이었음과 동시에 라디오 진행을 5년간이나 해오고 있는 베테랑 진행자였기 때문이다.
‘라디오 진행이라.....’.
‘까짓 꺼 또 한번 부딪혀 봐?’
리포터 조차 한번 해본 적이 없는 나를 뽑아 줄까 싶었지만, 도전하는 데 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부랴부랴 원서의 빈 칸을 채우고 라디오 디제이로 가장 적합할 것 같은 내 성향들을 추려 자기 소개서를 완성했다. 허둥지둥 이메일 전송을 완료하자 만가지 생각이 몰려 왔다. 설마 나를 뽑아 줄까 하는 마음부터 하면 너무 재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러면서 꽁트를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프라임 시간대에 최화정 같은 디제이가 되어 공개 방송을 하는 생각, 즐거웠다가 두려웠다가 아직 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마음이 롤러 코스터를 탔다. 승부수는 던져졌으니 나머지는 될 대로 되라 하며 두어 밤을 자고 일어나니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서류 심사에 통과 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우경아 사랑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는 성경 구절이 딱 맞는 말씀 같았다. 이번에도 면접 불패의 신화를 이어나갈 좋은 기회였다. 내가 가진 언어의 달란트, 그리고 진행자로써 필요한 센스 있는 감각을 총동원해 증명해 라디오 디제이로써 최대한의 역량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마음 먹었다.
면접은 지사장과 프로그램 피디들, 그리고 메인 아나운서와 함께 진행 되었다. 보이지 않는 매체인 라디오 진행자를 뽑는 자리였음에 불구하고 많은 지원자들이 헤어와 메이크업, 그리고 아나운서 의상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왔다. 늘 입던 내 스타일의 옷을 단정히 입고 이어진 면접에서는 대본에 주어진 라디오 진행 멘트와 뉴스 초안, 초봄을 소재로 애드리브를 구상해 이어가는 과제가 주어졌다. 아나운서 학원을 다닌 경험이 없지만 숱하게 들은 것이 뉴스요 라디오가 아니던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본의 분위기를 살려 전달하는 데 힘을 썼다. 그리고 이어진 일대일 면접에서 진행자로써의 자질을 묻는 질문에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추리고 골라 심사위원들이 듣고 싶어할 만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결과는 합격 이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한 두 번의 라디오 진행 모습을 실황으로 지켜보고 다음주부터 바로 투입이라고 했다. 합격하는 일과 진짜로 진행하는 일은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완전 별개의 문제였다. 급히 우경을 호출해 발성부터 발음, 호흡, 그리고 멘트 진행과 애드리브까지 꼬박 일주일을 매달려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다. 작가에게서 첫 번째 원고가 도착했고 틀리지 않으려 수십 번은 읽었던 것 같다. 모든 코너에 대본이 다 주어져 있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문제는 선곡이었는데, 선곡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방송 내내 긴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고 나의 주말 방송이 다가왔다.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중간중간 피디의 얼굴 표정도 살펴야 했고, 방송 전까지 아무런 긴장도 하지 않던 내 심장은 온에어 불빛을 보자마자 벌렁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도무지 긴장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시그널이 이어지고 오프닝 멘트를 읽었다. 수없이 읽은 한글이 마치 다른 나라 언어처럼 느껴졌다. 긴장한 탓에 혀가 꼬일까 목 근육에 더 힘을 주었던 것 같다. 1부, 2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3부, 4부가 이어졌다. 나오는 노래는 주로 운전자들을 위한 트로트 곡이었는데, 신나는 트로트 곡을 듣는 순간은 긴장이 사그라 들었다.
그러나 복병은 예기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로 실시간 교통 상황이었다. 방송 중간 중간에 사고 소식이 접수될 시에 진행자는 사고 내용을 긴급으로 전해야 했는데, 포항 지리가 익숙하지 않기도 했고 한번도 읽거나 연습해 본 적이 없는 교통 관련 소식이라 전달하면서도 어휘들이 입에 붙지 않아 몇 번이나 멈칫했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나이로는 한참 어린 김채영 피디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실수라도 있을라치면 피디 전용 마이크가 켜지고 주의할 부분에 대한 지령이 내려졌다. 그야말로 생방송 이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잔뜩 긴장한 신입 아나운서의 첫 방송은 끝이 났다. 두 시간 생방송이었지만 이틀 걸려 진행을 한 듯 온 몸이 뻐근해 왔다.
‘아... 세상에 정말 쉬운 일은 하나도 없구나...’
광고가 나가는 오분 동안 다음 방송을 위해 부스가 비워지고 큰 실수는 없었으나 스킬도 자연스러움도 없던 신입 디제이는 남아서 다음 베테랑 진행자들의 방송을 모니터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저녁 프라임 시간대 진행자였던 여자 엠씨는 어찌나 진행 솜씨가 유려한지 ‘왜 서울에 가지 않고 이런 시골에 남아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 2부가 각각 끝날 때마다 나는 바깥 기술석에 앉아 박수를 쳤다. 역시 사람을 노련하게 하는 건 시간이고 그 시간 안에 수많은 고민과 연습, 그렇게 쌓인 시간은 마침내 전문가로써의 지위를 결과로 안겨다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의 방송을 모니터하며 오만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진행도 안정되어 갔다. 대본 한번 보지 않고 앉아서 애드리브로 방송을 찜 쪄먹을 베테랑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세 번 소리 내어 읽으면 멘트가 꼬이지 않는다는 것, 대본과 선곡 노래의 시간을 대략 가늠하고 다음 코너까지 공백을 채울만한 애드리브는 필수라는 것, 그리고 가끔 길지 않은 몇 초를 채우는 데는 현재 시각이 만만하다는 것 등의 요령들을 익히며 지루하고 조용한 시간대였지만 무리 없는 진행을 이어가며 주말 근무 피디들의 핀잔을 조금씩 덜 듣게 되었다.
그러고는 진행 실력과 방송 진행자로써의 능력을 나름 인정 받아 주말 프라임 시간대인 오전 12시 생방송을 남녀 혼성 진행으로 맡게 되며 빠른 성장을 이어갔다. 거기서는 메타세콰이어 숲이나 주말 관광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흥겹게 트로트 메들리를 논스톱으로 이어가며 애드리브를 하기도 하고 남녀 간의 사연을 꽁트로 소개하기도 하고 프로그램 가운데 최신 뉴스도 전달하며 나의 라디오 진행자 시절은 대학원 복학 후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일 년 반 가량 이어졌다.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지만 재미는 있었다. 방송이 잘 된 날 끝나고 느끼는 뿌듯함이 부족한 바우처 금액을 채워 주는 듯 했다. 더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수업 일정이라도 조금 변경될라 치면 일주일에 5일 간을 학교에 다녀야 하는 내게 주말 진행을 계속 병행하는 것은 너무 고됐다. 아마 보수가 좀 더 합리적이었다면 기를 쓰고 몸을 고아가면서라도 자리를 고수했을 지 모르지만, 한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열정 페이 수준의 대우는 마흔이 넘은 내게 더 이상의 동기 부여는 가져다 주지 못해서 잡고 있는 것이 내게 유익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름이 시작되기 전 고민 끝에 단호히 종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는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위태롭기도 했다.
라디오 진행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내 삶에 새로운 꿈을 가져다 주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은 상관 없는 개개의 점이지만 결국 그 점들은 이어져 하나의 선이 된다. 다시 신입으로 뼈를 가는 시간들은 그 이어나갈 눈부신 선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 이제 다음 스텝으로 달음질하면 될 일 이었다.
‘그래! 다시 뛰자. 새로운 고지를 향해 다시 뛰어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