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이는 없어요
내 죽마고우 지인들은 고등 학교, 대학교 동창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크리스천들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리라는 레토릭을 부르짖으며 이율배반적인 신앙 생활로 몰매를 맞고 있지만, 성경은 늘 변함이 없고 내가 아는 하나님도 항상 동일하시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나의 지경이 넓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열심히 노력을 하였음엗도 불구하고 내 주변(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몇몇 인연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간절히 바라던 넓고 화려한 인간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결혼 후 나의 삶이 의도와 달리 비탈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나는 여러 군데 점을 보러 다녔다. 남편과 나의 운명과 사주를 점치며 철학관에 앉아 가기 전보다더 낙심하였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이직이 잦아 내가 먹여 살려야 할 팔자라는 소리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둥, 서울에서 더 북쪽으로(?) 이사를 가라는 둥, 심지어 전화 번호를 바꾸고 속옷 색깔을 달리해 입으라는 말까지 음양오행이라는 기준에 맞춘 온갖 주술적인 조언들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재미로 들른 철학관에서 앞으로 신세가 펴기 위해서는 지금 쓰고 있는 전화 번호를 바꾸어야 한다는 역술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고, 더 이상 말 같지도 않은 조언은 듣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내 발걸음은 삶의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찾아 절대자에 대한 뭉근한 마음을 피우며 교회로 향했다.
이사 온 아파트 모퉁이를 끼고 아담하게 솟은 교회에는 노인들과 나보다 더 높은 연배의 분들이 대다수였다. 등록하고 말고의 의식도 없던 내게 사모님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셨고 나는 나름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막연히 대구에 내려가면 교회를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한 터라 등록도 그 후 예배 생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셀이라 불리는 작은 소모임에도 나가고 어딘가 모자라고 갈급했던 내 마음의 우물이 깊이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그 시간들이 이어주는 움직임에 나를 맡겼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가고 속내를 나눈다는 것이 어딘가 불편한 점이 없지도 않았지만, 내 안에 절대자를 향한 갈증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견뎌낼 만 했다.
그곳에서 내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대한 것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중되고 그러면서도 마음들 사이에 장벽이 없으며 삶이 보듬어지는그런 교제를 나는 원했던 것 같다. 신 앞에 모든 것이 결코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 이 땅 위에서의 인간사 아니던가. 서울에서 오래 지내다 온 나의 개성은 어떤 이들에게는 환대를 받기도 했고, 또 때로는 솔직함으로 무장된 나의 곧은 성격이 칼이 되어 누군가를 찌르기도 했다. 어딘가 조직에 나를 끼워 넣는다는 것이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결코세상은 내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렇게 그 시절 그 곳에서 누리고 자라 성장을 거듭하며많은 것을 배웠지만. 한 가지 견디기 힘든 것이 있었다. 바로 나만 홀로 아이가 없다는 거였다.
내가 아이를 한번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다. 신혼 초 내 삶에 대한 계획이 너무 많아 아직 아이를 맞아 들일 마음이 부족했던 그 때, 운이 좋게도 자연 임신이 되었었다. 철이 없었던 탓인지 이미 초등 학생 자녀를 기르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아이를 낳아 키우며 같이 성장해가는 인생의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 아이를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그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결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욕심이 임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장애물처럼 인식하게 했다.
임신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자 남편을 뛸 듯이 기뻐했다. 아 주흥분되고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2세가 생긴다는 사실을 큰 기쁨으로 받아 들였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생명이 소중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보잘 것 없는 스스로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기뻐하지 못하게 했다. 너무도 철없고 어리석은 반응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내 몸과 마음이 묶여 더 이상 내가 누리는 현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거라는 불안이었다. 정확히 서른 중반이 된 나이, 충분히 젊었고 충분히 건강했고 결코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나이였음에도 나는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굴어 남편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새 생명을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언질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만족을 채우려 차를 몰고 외출한 어느 날, 으슬으슬 몸이 시려 오더니 갑자기 하혈이 시작되었다. 놀란 가슴에 서둘러 차를 돌려 산부인과로 향했고 이어진 검사의 결과는 계류 유산이었다.
마음이 덜 자라서인지 슬프거나 가슴 아프기보다 그저 얼떨떨했던 것 같다. 아직 퇴근 전인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자 남편은 몹시 마음 상해 했다.잉태된 새 생명이 무사히 자라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내 잘못인지 아닌지 당황스러운 마음이 밀려 왔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남편과 통화를 끝내고 나니 철 없는 내 마음에도 미안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조금만 더 있다가’라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내 마음이 크게 잘못하여 일을 그르친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남편과 다시 병원을 찾았다. 아이 셋을 낳고도그 자리를 지키던 산부인과 주치의 선생님은 결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단지 착상하는 과정에서 건강하지 못한 유전자들이 활동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자신은 아이 셋을 임신하고도 계속 일을 했노라며 유산은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무지했다. 의사선생님의 말은 반은 맞기도 하고 반은 그렇지 않기도 했는데, 우선은 나의 임신을 내 스스로가 축복하지 않았고, 또 나는 임신 초기임에도 철 없는 생각을 따라 행동했으니 무지했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다른길이 없다.
그렇게 첫 생명을 보내고 남편은 나에 대한 섭섭함으로 마음의 빗장을 한동안 단단히 걸어 잠궜었다. 마음을 닫은 그의 태도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내 마음을 버리고 그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니 깊은 상실감과 섭섭함이 느껴져 한동안 나는 불편한 그를 그대로 받아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첫 아이는 나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생명으로 자라기 전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곁을 떠났다. 그 후 우리는 몸과 마음을 회복했고 삶에 다시 집중했으며 함께 평온한 시간을 이어 나갔다. 나에게 아이를 갖고픈 바램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절대적인 간절함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연스레 꼭 생기기를 바랬지만 주변 사람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공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나이가 마흔을 향해 가고 있었고 (여전히 별로 쥔 것이 없었음에 불구하고) 내 기득권에 대한 포기를 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아이가 없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걸림돌이 되었다. 서울이면 조금 덜 했을 수도 있겠지만 비교적 살기가 편해서인지 지방에는 거의 아이가 없는 집이 없었다. 외동도 희귀했을 뿐 더러 둘 셋 있는 집이 의외로 많았다. 또래와 마주 앉아 아이 이야기를 빼고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고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아무런 안도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된 건 아니다. 그저 각자의 모습이 다른 것일뿐. 그렇게 나는 한동안 어디에도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해 마음이 허한 기러기처럼 영혼의 귀퉁이를 접은 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둥둥 떠다녔다. 삶이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다고 생각된 그런 날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아이가 없다. 누군가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면 입양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나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를 해주지만, 생명이 소중하되 내가 한생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책임질 만큼 믿을 만한 사람은 못 된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다. 아이가 없다는 건 나를 평범함에서 조금 비켜간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내 모습에 결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가끔 내 의도나 본 모습과 다르게 그들의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본다. 피로하다고 느끼기도하지만 어떻게 보이는가는 내 영역이 아니다. 시간이 자연스럽게 접힌 오해의 모서리를 펴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어 마지막으로 묻겠노라며 남편에게 아이를 가지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질문했을 때, 남편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노’라고 대답했다. 사느라 반절도 더 지나가 버린 인생의 나머지를 아이를 위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서 였을 것이다. 그렇게 2세에 대한 우리의 합의는 이루어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아이가 있냐고 내게 묻지 않는다. 그때의 시간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이가 없어 원하는 걸 하며 마음대로 사는 내 인생이 부럽다고 말해주는친구들도 있다. 다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지만 아이의 성장과 학업과 인간됨을 만들어나가느라 애쓰는 노고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건 맞다. 치대고 넘어지는 삶의 씨름 속에서 한숨 섞인 친구들의 투정을 듣노라면 가끔은 내 인생도 나쁘지 않지 싶다가, 온 몸이 쑤시고 관절이 흔들리는 처량한 날이 되면 기댈곳 없는 내 노후가 염려스러워 눈물 짓기도 한다. 물론 아이가 노후 대비용은 어니지만.
그래서 혹 자발적 비자발적 딩크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인생 전체를 통틀어 만들어가고 싶은 가정의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고집스레 고수하는 길에 대한 후회를 끝까지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도.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에. 시간과 함께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존재기에, 결코 오늘의 나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꼭 자문 해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한 겨울 시린 밤 나와 같은 후회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