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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라이터 호 Oct 29. 2022

오버 더 레인보우

나는 매일 집으로 출근한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숙면을 하고 일어난 아침 귓 가에서 노래가 들려오는 듯했다.


무지개 너머 저 어딘가

꿈결에 들은 한 곳이 있어


꿈결에 들은 곳...

꿈결에 들은 곳...


꿈결 속 무지개 너머 저 어딘가에 희미하게 들은 곳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무엇으로 이 시간을 채울까’


교보 문고로 달려가 서고를 뒤적거리며 읽지도 않을 책을 몇 권 집어 들까 하다 핫트랙스로 내려갔다. 딱히 살 것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빽빽이 들어찬 대형 문구점을 구경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잘빠진 펜이나 하나 건지려 한 것인지 몸은 어느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붐비는 사람들과 웅웅대는 음악 소리에 머리가 어지울 게 뻔했지만 뭐라도 하나 집어오려고 그랬는지 발걸음은 이미 좁은 통로를 가로질러 눈과 함께 여기저기 훑어대고 있었다. 한 해 허리춤이 꺾인 지는 이미 오래 지나 날씨는 찬 기운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시작되지 못한 내 시간의 이정표들은 남은 날이라도 어서 재정비를 해달라며 내게 요구하고 있었다. 책상 모서리에 주식 시황을 적어 놓은 흰색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칸을 쪼개 거기다 뭔가를 적어도 됐겠지만 결이 다른 개체들이 뒤죽박죽 구질 거리는 게 싫어 해 저무는 초가을 발길은 어느샌가 신년이 한참 지나 이제는 종류가 몇 점 남지 않은 다이어리 코너로 향하고 있었다.


‘해 저무는 이 가을에 다이어리라니’


내년을 기약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오늘이 출발점이 되어 내 시간을 다시 당겨줄 방아쇠가 필요했다. 일별로 시간별로 자잘하게 나눠진 빡빡한 스케줄러는 보기만 해도 숨이 찼. 이제 더는 빡빡한 스케줄러에 구속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지로만 채워진 어벤저스 그림의 다이어리를 폈다. 도화지 같은 종이가 자꾸 무얼 그릴 거냐고 재촉하듯 물어와 표지를 확 덮었다. 정확히 무얼 찾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호한 목적으로 폈다 덮었다 폈다 덮었다 반복하기를 몇 차례, 무언가 눈에 띄었다. 북유럽 디자이너의 벽에나 걸려 있을 법단조로운 꽃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연노랑 바탕에 남색에 가까운 보랏빛 꽃이 자기를 집어 들라고 말을 거는 듯했다. 맘에 들면 살 요량으로 비닐을 조금 뜯었다. 


'년 월 일 세 칸'

'빈 줄 세 '

'그리고 공'


내가 너의 시간을 이끌 테니 네 작은 아이디어를 이곳에 채워 보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수초 간 고민한 후 망설임 없이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소지품만 겨우 들어가는 작은 핸드백에 철 지난 신상을 밀어 넣었다.


'무얼 할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채울까'


빈칸을 채우면 될 일이다.


청소기를 돌리다 산책을 하다 심지어 운전을 하다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적었다. 생각이 하나 둘 셋은 넘기지 않게 매일의 아이디어들을 적어 나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자 생각들이 하나의 선이 되어 연결되고 있었다. 뼈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뼈대의 골자는 모두 '나 혼자 하는 일'로 귀결되었다. 혼자 하는 일이 다시 가지를 내어 하나 둘 세  개의 프로젝트로 변신했다. 조각난 생각들이 트랜스포머가 되어 뼈대를 세우고 헤치기를 반복했다. 몸이 하나라 한 꺼 번에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예전의 자신감 넘치는 나도 아니었기에 몸을 살살 달래 가며 조금씩 시작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을 썼다. 최근 들어 사람 만나는 일이 시큰둥해지며 복잡한 감정들을 풀어낼 적당한 출구가 없었는데 글쓰기를 출구 삼아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작품이 되면 좋겠지만 시작이 굳이 완성형일 필요는 없으니 기획한 대로 끝까지 쓰는 걸 우선 목표로 했다.


그리고 교안을 짰다. 콘텐츠가 없어서라기보다 개성 없이 흔해빠질까 두려워 먼발치에 밀어 두었던 지긋지긋한 영어를 다시 꺼내기로 했다. 이 아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날아다니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식탁에서 서둘러 식사를 마쳤을 때 조심스레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제주도에  내려가 살아도 되겠는지. 이유는 설명해주어야 할 듯싶어 지친 내 인생에 얼마간의 변곡점을 갖고 싶다고 말을 했다. 선 자리가 흔들릴 때마다 한 번씩 내려가 태고의 길을 걸으며 머리를 식히고 오던 그였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알아보았냐며 돈 낭비 시간 낭비가 되지 않겠냐고 남편은 말했지만 원한다면 왔다 갔다 하는 조건으로 몇 개월은 허용해 줄 수 있다고 답해주었다.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아우. 고마워.'


뭉근한 시간을 지내며 수년간 닫힌 문 앞을 서성였. 그러다 이제 발을 옮겨 다른 문들 앞에 나를 세워 두었다. 그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이 초원 일지  놀이동산 일지 황무지 일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해야 할 일은 내 안의 열쇠를 꺼내어 용기 있게 꽂아 보는 일뿐이다. 그 문이 열리는 문인지 잠긴 문인지 알 수도 없지만 혹 그럴지라도 문은 다시 찾으면 될 일 아닌가. 누군가는 말끔히 포장된 도로 위 휴게소에 그저 잠시 들러 쉬었다 가라고 해주었지만 같은 장면 같은 시간 같은 노래를 한 시도 견디지 못하는 이가 나인걸 어찌하랴. 그러니 시들지 않기 위해 무작정 숲을 찾아 헤매이는 수밖에. 응원인지 만류인지 모를 주위의 무심함을 뒤로하고 다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중년의 출발은 더뎠다. 자연의 섭리에 맡겨진 몸과 싸워야 했고 시든 젊음에 합당한 이유를 붙여 주어야 했으며 뒤늦은 도전에 용기도 불어넣어 주어야 했다. 뒤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나의 계획을 순순히 따라와 줄 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늘을 살아 숨 쉬는 내 존재의 목적성을 믿는 수밖에.


때때로 삶은 또 다른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 내 어깨를 치며 뼈와 심장을 흔들겠지만 굽은 세월을 지난 나의 뿌리는 이전보다 견고해졌다. 매 순간 중력에 삼켜지며 쇠하여지겠지만 반생을 통해 이제는 더 단단한 근육을 얻었으니 이걸로 충분했다.


가을을 시샘하듯 여름이 겨우 비킨 자리에 미련 많은 여름이 비를 뿌려 주었다. 찌뿌둥 기지개를 켜려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든 자리에서 희미한 무지개가 보였다.


'잊지 않겠노라'

'너를 잊지 않겠노라'


일곱 색을 증표 삼은 신 약속처럼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희망이 마음에 드리웠다.


'꿈결에 들은 곳'

'꿈결에 들은 곳'


미지의 그곳을 향해 오늘 내 두 발을 다시 힘겹게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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