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은 시절마다 교훈을 남기고 다시 돌고 도는 것’
한 동안 침체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지난 기억들은 희미해졌고 무겁던 마음의 추도 무게를 줄이며 나에게 더 많은 해방감을 주었다. 대부분의 시간 ‘자유’를 외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 갔다. 그 무렵 대구에 살던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낙성대 언저리 즈음으로 이사를 한 터였다. 갓 직장 생활을 시작한 동생에게 미안하지만 생활의 일부를 좀 기대고 나머지 시간은 심하게 구겨진 몸과 마음을 치유하면서 아주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난 회사들을 다니며 내가 느낀 나에 대한 성찰이 있다면 '스스로 부족하다는 열등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가졌다는 것'. 그리고 우리 집안의 기질을 이어 받아 자존심이 강하고 굽힐 줄 몰라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였다.
회사를 다니며 참을 수 없는 점은 상처 받지 않으려는 영혼들과 함께 온 심장을 집에 두고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그런 상황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당시 회사에서 담당했던 기획 업무와 직원 교육 업무는 굉장히 적성에도 잘 맞아서 일이 나에게로 몰리는 것 말고는 어렵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인내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맡은, 즉 나에게 주어진 모든 업무의 완료 후 종료 휘슬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계속 책상에 앉아 때로는 눈치를 봐가며 저녁까지 근무 시간을 꽉꽉 채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는 사람보다 일을 더 좋아하던 터여서 주 5일 근무 외에 워크샵이나 출장이라도 있을 때는 나의 모든 시간을 회사에 바치며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가끔 그런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면 잠시 외출 허가를 받고 인근 커피숍 등받이가 긴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난 직장 생활이랑은 맞지 않는 거 같아.’
‘하루하루가 버티기 힘들었던 건 어쩌면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일 지도 몰라.’
‘앞으로 다시는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아.’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흐린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뒤 모습이 그림 같다며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셨던 옆 팀 강정숙 과장님이 떠올랐다. 출장에서 돌아와 보고서를 쓰려 회사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잦은 출장으로 늘 피곤에 절어 있던 나를 물끄러미 보며 그녀는 한 마디 해주었다.
“린다는 재능도 많은데 프리랜서 해도 잘 할 것 같아. 누가 알아? 적성에 맞을지? 프리랜서 한번 도전해봐요.”
아, 책에서나 보던 그런 종류의 직업군 아니던가.
‘너무 좋지, 프리랜서…’
‘그런데 프리랜서를 하려면 컨텐츠가 있어야 하는데… 난 뭘로 프리랜서를 하지?’
그렇게 매일 베스킨라빈스 월넛 싱글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민에 고민은 이어졌고, 읽을 책이나 한 권 사려 무심코 들른 교보문고에서 흥미로운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프리 에이전트 에이지’
외국 작가가 쓴 자기 개발 번역서였는데, 오래 되고 낡아 지금은 서고에서 사라졌지만, 온통 프리랜서 직업에 대한 소개와 입문 방법, 장점과 단점, 그리고 작가 본인이 느끼는 그 직업군에 대한 예찬과 그리고 곧 프리 에이전트가 더 많아지는 세상이 온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유레카!’
하늘은 역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때부터 나의 경력과 강점, 내가 가진 컨텐츠들을 분석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에 띌 만한 뾰족한 해답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남은 시간 나의 컨텐츠를 개발하고 스스로 나를 고용하여 급여를 창출하는 혹은 창출 받는 프리 에이전트로 살아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 좋은데, 그런데, 뭘 해서 나를 팔 수 있을까?’
마음은 굳혔지만 그렇다고 딱히 묘수가 있던 건 아니었던 애매한 시간이 계속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