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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람 구경 3

by 인디라이터 호

드디어 팀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얼굴로 한 사람이 왔다. 케이라 킴이었다. 교육 부서에서 교육 지원과 기획까지 업무가 늘어나며 보다 전방위적인 인물이 필요했고, 그렇게 등장한 케이라 킴은 홀홀 단신 유학을 떠나 10년 동안 한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던 매우 강한 기질의 야망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케이라가 팀장으로 오고 난 뒤 스포트라이트를 뺏긴 나는 그녀의 업무 승계와 업무 인지에 무척이나 툴툴거리며 비협조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은 충분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서 자격 없는 사람이 상사가 되는 건 지난 번에 끝났어야 하는 거란 이유 때문이었다. 역량은 뛰어났으나 스펙이 부족했던 내 모습에서 나온 일종의 자격지심 같은 거였다. 케이라는 그런 나의 비협조를 눈치 했는지 미친 듯이 업무를 파악하며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는 매우 단기간에 의심 서린 눈초리를 보내던 임원진의 우려를 뒤엎고 강한 추진력과 창의력으로 우리 부서에 새 바람을 불어 넣었다. 관심의 촛대가 그녀에게 옮겨졌다. 불필요한 자존심을 세우며 상당 기간을 버텼던 나는 이제는 무릎을 꿇고 진짜로 그녀의 부하 직원이 되어야 했다. 내가 추진한 사안을 몇 번 가로채 보고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내면 케이라는 바로 수정해 주었다. 그리고 뻔히 눈에 보였을 나의 시기 어린 질투를 상당 기간 인내해 주었다.


그러나 일은 그 후 발생했다. 우리 부서가 주축이 된 주요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자 자축하듯 이어진 가을 워크샵에서 그녀는 여러 부서를 돌며 건배를 이어갔고 마침내 과한 술과 피로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쓰러졌다. 갑작스런 위기 상황에 염려가 되어 내가 그녀를 부축하려는 찰나, 몸은 정신이 없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서 였을까? 손길을 내밀던 나의 부축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 날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의 크기를 그녀가 다시 내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미안함과 약간의 억울함, 그리고 구질구질한 감정이 뒤섞여 몰려 왔다. 그녀의 행동은 적잖이 충격이었지만, ‘되로 주었으니 말로 받을 것을 받는 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케이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매우 공정하고 성실하게 계속 업무를 진행했는데, 발톱을 내게 직접 세우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철저히 나를 배제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열등감과 교만이 합작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였다. 오래 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이 곳을 떠나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환경으로부터 도망가야겠다는 비겁한 생각만이 다는 아니었다. 마음과 영혼의 기름기가 쭉 빠져 푸석해질 대로 푸석해져 버린 내 모습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동의할 수 없는 생존 구호만 난무한 곳에서 더는 같은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가르쳐 준 적 없지만 내 모습이 투영되었는지 내 마음이 배회할 때 정아씨는 이미 내게 등을 보이며 돌아선 터였다. 아무도 친구가 될 수 없던 곳에서 동료를 얻고자 한 순진한 내 마음과 내 오만을 자책하며 '자업자득'을 머리에 새기고 두 번째 사표를 썼다. 패배로 점철 된 말도 안 되는 싸움에 힘껏 지쳤는지 그냥 쉬고 싶어졌다. 더 이상 지루한 근무 시간을 꾸역꾸역 채워가며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주었다.


케이라에게 깊은 미안함이 몰려 왔다. 내가 나간다는 사실에 그녀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홀로 나와 빈 서류 박스를 챙겨 나가는 나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었다.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관두고도 오랫동안 내 안의 교만과 시기심과 질투가 다시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돌아 왔다는 생각을 했다.


까놓고 보니 결국 나도 한 줄 남을 평할 처지가 못 되는 볼 품 없는 인간이었다.


“미안해요……”

“미워한 많은 날들을 지나 지금은 전할 수 없는 깊은 미안함을 느낍니다. 지금쯤 미국 땅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도 그 때의 철없던 기억이 악몽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며, 저의 늦은 사과를 전해요. 그때 죄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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