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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사람 구경 2

4화: 사람 구경 II

by 인디라이터 호

일산에서 양재동까지 첫 번째 회사를 다니며 출퇴근했던 길은 참으로 고됐다. 새로운 환경이 재미있었고 일도 너무나 신선해 그 시간이 엄청 힘들게 느껴진 건 아니었지만, 그저 작은 사거리를 뱅뱅 돌던 촌뜨기 상경녀에게 하루 두 시간 넘게 왕복으로 타야 하는 지하철은 참으로 지루했다. 동두천에서, 수원에서, 저 멀리 오산과 하물며 대전에서도 매일 출퇴근을 수하는 수많은 출근러들이 있다는 걸 그 후에 알게 됐지만, 야근이라도 할라 치면 양재동 출퇴근길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양재동 출근을 위해서는 강남에 살아야 마땅한 일, 어차피 얼마 없는 보증금에 월세를 내야 하니 몸이라도 덜 고단하자 싶어 몇 평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허름한 개포동 아파트 4층을 월세로 얻었다.


안광이 빛나던 회장님이 갓 제대한 조카의 남자 친구를 내 위 선임 팀장으로 앉히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욱하고 회사를 관두지는 않았을텐데, 역시 인생은 가끔 한치 앞도 내보이지 않으며 야속하게 등을 보일 때가 있다. 사표를 고이 쓰지 않고 내 뒤통수를 친 경영진의 등짝을 후려 갈길 심정으로 ‘회사의 현 상태에 미래에 없다는 판단’ 이라는 문구를 넣어 매우 차분하고 담담한 작별 인사를 써 전 직원에게 보냈다. 말단 직원의 진상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래 봐야 아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겠지만, 약자라도 갑을 관계가 청산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의 수직 관계에 놓이지 않는 법 아니던가. 평판에 온 주의를 기울일 만큼 약은 성격이 못되었고, 또 온 몸과 마음을 사람에게 기대며 휘청이는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융통성 없고 성깔 있는 경상도 아가씨 느낌이지만, 그 후로도 그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름 속이 후련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이 급해져 왔다. 월세 날짜라도 늦어질라 치면 하루의 말미도 견디지 못하고 그 특유의 거들먹거림으로 전화를 하던 숭악한 집주인이 떠올랐다. 이번마저 ‘될 대로 되겠지’라는 초심자의 행운에 기댈 수는 없었다. 살아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IMF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덕이던 엄마 아빠의 고된 일상에 대한 자책감, 그리고 서울에서 생존하고 싶은 욕망이 뒤엉켜 부지런히 구직 사이트를 뒤져 지원서를 넣었다. 말도 되지 않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몇 군데 영업 회사들을 뒤로 하고 연락이 온 곳은 이름 있는 중견 기업이었다. 그간의 교육 이력과 업무 경력 그리고 자기 소개서가 인상 깊다고 말하며 면접을 볼 수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예스! 면접을 본 회사는 새로운 교육 기획자를 찾고 있었는데 그간의 경력을 활용해 조금 더 새로운 분야로 일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나에게 딱 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 불패의 자신감을 갖고 실무자 면접과 임원 면접을 사뿐히 통과한 나는 어딘가 불협화음이 가득해 보이는 교육 기획팀으로 발령이 났다. 이전 회사와 비교하면 뭐랄까 조금은 세련미가 없고 창의력이 느껴지지 않는 회사였지만, 그 분야에서 유명한 교육자들이 파트너쉽으로 대거 몸담고 있는 나름 탄탄한 조직의 회사였다. 성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지속적인 운영 지원과 새로운 교육 기획을 통해 새 바람을 불어 넣기를 원하는 그런 회사였다.


“안녕하세요? 조셉 김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부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눌한 말투의 교포인 조셉은 지금도 가끔 피식 웃음 짓게 만드는 잘 생긴 외모에 따듯한 심장, 그러면서도 업무적으로는 유능한 같은 직급의 대리였다. 이전 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으로 과장급 팀장으로 퇴사를 했던 나는, 연봉 협상을 하는 인사팀과의 최종 미팅에서 사내 연령과 경력을 맞춘다는 이유로 한 포지션 낮게 그리고 연봉도 살짝 낮추어서 입사를 했는데, 그 일은 두고두고 근무 기간 내내 나의 업무 의지를 꺾으며 후회로 남았다.


어딘가 순진하면서도 클래식한 분위기의 바로 위 팀장은 마치 음악 연주회 사회자 같았는데, 늘 계열사 사장님의 게임 업무 번역을 돕고 있었다. 아이비리그 대학 석사 출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스크립트 없이는 영어가 자유롭지 못했던, 아무튼 착한 것 외에는 그다지 업무적으로는 존경할 만 한 구석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는 비루한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를 메우느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며 (지금 생각하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업무적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이비리그 대학원 후배로 팀장을 따라 입사한 속이 아주 굳건하던 정아씨와 주로 업무를 같이 했다. 강남 출신에다 SKY 대학과 아이비리그 대학원마저 졸업한 그녀는 늘 주요 업무에는 맥을 짚지 못하며 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하곤 했는데, 어느 일이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역량을 잘 꺼내 쓰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늘 안스러웠던 것 같다. 만들어진 스펙의 무력함 때문 아닐런지. 그 회사는 무척 안정적이었지만 그 안정적인 분위기가 다수의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했다. 역량을 발휘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소수의 업무 역량이 높은 사람에게만 일이 집중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프리랜서로 일하며 가끔 대학생들에게 면접 교육을 할 때 무척 도움 되었는데, 그래서 가끔 세상은 처음부터 다 가진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가지지 못했으나 더 큰 저력을 가진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어 알고보면 공평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정아씨는 팀장을 무척 싫어했다. 무려 띠 동갑을 훌쩍 넘는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문 출신의 상사지만 그녀가 가진 업무적 미흡함을 몹시나 싫어했다. 배울 게 없다는 거였다. 어느 날 우연히 팀장의 연봉이 자신과 서너 배 차이가 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정아씨는 그녀를 더 싫어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메겨 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다. 팀장은 다른 계열사 사장님과 주로 식사를 하며 부서 내 이사진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추친하던 프로젝트 실패로 결국에는 경질되었다. 그후 그녀의 업무 권한이 내게 위임되며 그녀가 맡은 보직을 제안 받았지만, 고생이 불 보듯 뻔해서 였을까? 업무적으로 더는 복잡해지고 싶지 않었던 나는 상무님의 두 번의 승진 제안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가끔은 톱니 바퀴의 나사로 단순하게 사는 것이 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긴 공석을 메우기 위해 숱한 면접이 이어졌고, 그 거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나는 조금 느슨해진 조직에서 약간의 긴장을 풀고 다수의 분위기에 나를 묻은 채 평범한 직장인의 나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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