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사람 구경 I
대학교를 제외하고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벗어나지 못했던 광장코아 네거리까지의 구역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결코 깊이 사랑한 적은 없는 거리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그토록 오래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하자면 고문인데, 선택지 없이 부여 받은 수동적인 환경은 내 현실의 한계를 만들어 주며 나를 자주 벗어나고 싶게끔 만들기도 했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분노한 숟가락 스윙을 받아내며 어렵사리 얻어낸 탈출이었지만, 서울에서의 삶은 그 모태의 환경을 걷어 차고 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스스로 다시 정한 것이어서 이사 후 힘든 출퇴근 길에도 불구하고 나는 줄곧 기뻤다. (물론 그곳에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 똑똑한 사람과 조금 뒤쳐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같은 사투리를 쓰며 똑같은 거리를 지겹게 다녀야 하는 내 1차 환경에 물릴 대로 물린 나는, 새로 나가 본 이태원이며 삼청동, 압구정, 광화문, 하물며 가리봉동까지 모든 곳이 새롭고 신선했다. 숨 막히는 공간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이제야 산소가 넘실대는 곳에서 호흡을 터뜨리는 느낌이랄까? 살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 그러한 모든 새로운 경험들이 나를 위축되게 할 때도 많았지만, 분명 서울은 갇힌 도시가 아닌 기회의 도시, 힘겨울지라도 사다리를 뚝딱하고 만들어 올라가면 한 계단 더 위로 갈 수 있는 그런 도시이기도 했다.
서울의 수많은 인구 중에는 살면서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던 전라도 사람, 제주도 사람도 있었고, 대구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니 볼 수 없었던 MBA 마이너리그 농구 선수 출신의 교육 트레이너도 있었으며, 특허 기기를 개발하여 영화 대사를 따라 하며 어학을 학습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기를 고안한 수많은 서울대 출신의 회사 중역들도 있었다. 마치 삶의 단계를 한 번 점프해야 만날 수 있는 나와는 다른 이력의 사람들. 물론 그들의 능력과 화려한 이력이 빈틈 많은 그들의 생활과 인성을 포장해주지는 못했지만, 이삼십 분 거리의 직사각형 테두리만 돌다 온 나에게 그들이 주는 강한 생기는 충분한 도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미국에서 긴 이민 생활을 한 생기 넘치는 눈과 깡마른 체구가 아름답던 여성 상사분과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녀는 식사 자리에 한 동석자와 함께 했는데, 그녀가 함께 모시고 온 분은 그 당시 그녀와 작가와 팬 이상의 유대 관계를 가졌던 저명한 소설가였다.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법한 유명 작가와 식사를 하게 된 기회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무심한 듯 빗어 내린 곱슬머리와 중후한 색채, 그리고 중저음의 목소리에 묻은 독특한 그 분만의 억양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식사와 함께 대화가 시작되었다.
“린다의 첫 인상은 뭐랄까 굉장히 ‘프랙티컬’해요.”
“프랙티컬……”
그 누군가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특이한 첫인상 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똘똘하게 일 잘하게 생겼다’는 그 분만의 느낌을 프랙티컬이란 영어 단어를 써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한번도 그런 류의 칭찬을 들은 적이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요즘 잘 볼 수 없는 고전적인 여성 같아요.”
“남자 친구가 없다고 했나요?”
“네, 아직이요.”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요즘 젊은이들이랑 린다 같은 스타일은 연애하기 쉽지 않죠.”
지금 생각해보면 촌철살인 같기도 했던 그분의 한 마디는 당시 대구 촌뜨기의 서울 입성 연봉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그러나 계속 남자 친구는 잘 생기지 않아 고민이 많던 나에게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래서 네가 남자 친구가 없는 거야’라며 약간의 찬사가 섞인 절반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 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러면 비법을 알려 주세요’ 라고 나는 질문을 했고 쥐어짜도 여전히 아무 기억 나지 않는 걸 보면 별 의미 없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남자 친구가 없었고 새로운 서울 살이에 열심히 적응하며 뒤쳐지지 않으려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내 열심을 갈아가며 일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그 벤처 기업의 사람들을 떠올리면 국내외 일류 대학을 나온 젊고 유능하고 똑똑하며 야망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업무 능력처럼 그들의 개성도 너무나 화려하여 그 시절 우리의 일상은 카오스를 방불케 했는데, 성장과 맞물린 수많은 승진과 퇴직,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소요와 소문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마치 일상의 나날 자체가 블랙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 구경만큼이나 재미있고 가슴 뛰던 나의 첫 커리어 우먼의 여정은 새롭게 족벌 경영으로 사내 근간을 다지려던 서울대 공대 출신 회장님의 비열한 마인드에 대한 내 내면의 정의로움이 맞서, 살아 남는 게 가장 강한 거라는 월급쟁이의 불문율을 깨뜨린 순진한 나의 자존심으로 이년 만에 끝을 맺었다.
그 후, 회사를 세워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사내 브레인으로 통하던 전략기획부 마이클 장은 장기간
과로로 서른 둘에 유명을 달리했고, 대규모 펀딩으로 급속히 사세를 확장하며 신문에 이름을 오르내리던 그
블랙홀 같던 회사는 경영진의 방만 경영으로 도산의 위기에 처했으며, 광주 운송 재벌 딸과 결혼한 안광이
빛나던 야성적인 서울대 출신 회장님은 화류계에서 만난 그 누군가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과 함께 이혼을 했다. 아 참, 너무도 곱고 예의 바르고 성실했던 아리따운 혜원씨는 서둘러 결혼한 남편이 이상한 종교에 빠져 그 문제로 심하게 맘 고생을 하다 그만두고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어머, 그러고보니… 나 그래도 운이 좋았네.
바람 잘 날 없던 내 양재역 시절은 가끔 오늘처럼 지루한 날이 되면 추억과 함께 내 맥주 안주가 되어 준다. 맥주와 함께 추억을 질겅질겅 씹으며 이제는 있지도 않을 그 회사 옆 버거킹에 앉아 그 시절 사람들과 꿈결처럼 다시 만나 가끔 이야기 나누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