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들과의 대화는 도무지 코드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아이들의 미술 선생님 이야기는 그럭저럭 참을 만 했지만, 공통분모가 없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대화는 나를 서둘러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다. 아마 그 누군가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다른 환경 때문이리라.
10년 전 아버지의 밥 숟가락 스윙을 뒤로 하고 매몰차게 서울행 짐을 쌌던 나는 무슨 배짱으로 서른이라는 과년한 나이에 단돈 오백만 원을 들고 서울로 갔는지 모르겠다. 짐작컨데 주말마다 싸구려 옷과 액세서리를 쇼핑하며 좁은 시내를 배회하던 친구들과의 만남이 신물 나기도 했고, 당시로서는 결코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서른이라는 나이가 더는 나를 그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주말 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셔터 내린 거리의 풍경은 늘 시린 마음을 주었고, 닫혀진 상점의 문은 마치 내 삶을 향해 ‘이 곳엔 희망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트루먼 쇼의 짐 캐리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과 어릴 적부터 다를 것이 없던 동일한 내 삶의 테두리는 이제 더는 새로울 것이 없어 때때로 원인 모를 답답함을 내 마음에 내려 주곤 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야 하는 고리타분한 현실도 한 몫 했다. ‘젊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모함’ 따위의 거창한 레토릭 따위 하나 마음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유일한 사실은 '더는 그 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이제 더 이상은 머물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떠나는 거다!
어학 연수 한 줄이 그럴 듯한 이력이 되던 시절, 대학 생활 내내 내 전공인 불어는 불문에 붙이고 어줍잖게라도 영어를 파두었으니 먹고 살 일은 미래의 내 삶에게 맡기고 떠나면 될 일이었다. 몇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꾸깃꾸깃 모은 종자돈은 정통으로 IMF를 맞아 휘청거리던 집으로 다 들어간 터였지만, 나는 여전히 젊고 젊음은 곧 희망이 아니던가!
음식점을 하시던 부모님 덕에 고기 반찬을 물리도록 먹었고 나의 심미안과 약간의 예술성을 드러낼 만큼 뒤지지 않게 입고 메고 살았으니, 타고 난 내 운명의 끈을 믿고 한번도 꿈을 위해 살아가 본 적 없는 가련한 나를 위해 당차게 짐을 싸면 될 터였다. 어딘가 좋은 자리에 시집 가 귀퉁이가 구겨진 친정을 도와 주었으면 하던 아버지의 남모를 바램을 뒤로 하고 꾸역꾸역 짐을 쌌다. 몰래 등 뒤에서 울고 있을 엄마와 아직 학교를 덜 마친 두 동생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내 마음을 주춤거리게 했지만, 긴 여운의 그림자를 잡기에는 나 스스로에게 너무도 희망이 절실했기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내 인생의 항로가 그 시절의 삶의 테두리를 넘어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다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