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단단 단단단단~ 단단단단 단단단다~ 프리티 워먼 워킹 다운 더 스트리트~
프리티 워먼 더 카인드 아이 라이크 투 미트~
그렇게 처음 정착한 곳은 일산이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살아보고 싶은 호기심 어린 야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얻을 수 있는 동네는 일산이 적당했다. 대학 시절 내내 흠모해마지 않던 외국 물 잔뜩 먹은 미대 출신 가수가 라디오에서 줄곧 이야기한 호수공원이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은 연락이 끊긴 잠시 의기투합했던 노처녀 언니가 추천한 곳이기도 하여서 뒷일은 접어두고 백석동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서울도 아닌, 지하철을 타고 정거장을 한참 지나 연신내 구파발 들어본 적 없던 변두리 길로 한참이나 더 가야 했지만 이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써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왠지 모를 희망처럼 다가왔다. 동네 부동산을 뒤져 단박에 구한 창이 넓은 복층 오피스텔은 혼자 살기에 나쁘지 않았다. 여러 주거용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막 지어지고 있던 그 동네는,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무미하고 건조한 지역이었는데, 부푼 마음과 머리 속 가득 찬 희망 때문인지 그닥 생기가 돌지 않던 그곳 공기마저도 청량하게 느껴졌다.
말하자면 그것은 젊음, 두 손 가득 한 알도 놓치지 않고 꽉 쥔 원석처럼 빛나던 내 지난 날의 젊음, 그 젊음 때문이었으랴!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 마침 맞게 얻은 오피스텔 주변을 익힐 요량으로 어슬렁거리며 지내기를 며칠, 슬슬 다음 달 월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옆으로 찔러 준 얼마간의 비상금이 있었으니 바로 걱정해야 할 사안은 아니었지만, 독립 생존자는 하루도 다음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구직 사이트를 뒤져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는 그간의 경력을 대략 기술한 이력서를 만들어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포지션으로 등록을 해두었다.
‘될 일은 반드시 된다! 열려라 참깨!’ 그렇게 주문을 외며 일상의 날은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게 임한 건 신의 가호였다. 속칭 지잡대 출신의 아이들을 가르친 것 밖에 다른 경력이라고는 없는 볼 품 없는 이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력서을 게시한 지 이틀 만에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식 구직 활동을 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요, 그저 아르바이트나 하며 꿈에 그리던 쇼호스트 준비나 해볼까 하여 매우 허술하게 이력을 기술 했음에도 나의 이력을 보고 면접을 본다는 회사가 있다니! 생각보다 서울이 만만하게 느껴졌다. 간단한 전화 면접 후, 정식 면접 날짜를 잡았다.
‘이 분들은 대체 뭘 보고 날 만나자고 하는 거지?’
한 두어 벌 챙겨온 원피스를 다림질 해 단정히 차려 입고는 한 시간쯤 지하철을 타고 양재동으로 향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 건물들이 내 몸 속 세포들을 흥분시키는 것 같았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말쑥한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에 서류를 낀 채 종종거리며 테헤란로를 걷는 모습, 한 손엔 전화기 다른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바쁘게 통화하는 모습,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그림에 판타지가 더해져 나는 이미 아름다운 커리어 우먼이 되어 거리를 날아 다니고 있었다. 피식하고 부끄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면접 회사는 양재동 뱅뱅 사거리 인근 건물 10층에 있었다.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회사 문을 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오늘 2시에 면접 예정된 정성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한 눈에 보아도 우아해 보이는 나이 든 비서 한 분이 복도 끝에 있는 조용한 접견실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리셉
션에는 그 분말고도 아리따운 젊은 비서 두 분이 모니터를 보며 차분히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진지한 사무실
공기와 그분들의 고운 차림새가 회사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가늠하게 해주었다. 면접관으로 어떤 분이 들어올지 궁금해지자 입술이 마르며 긴장 되었다. 즐거운 상상으로 들떠있던 머리 속은 바로 긴장 태세로 전
환 되었다. 오십 명은 족히 앉을 만한 길다란 원탁 테이블 모서리 자리에 앉아 접대용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리고는 무슨 대답을 할까 고민했다.
‘왜 날 부른 거지? 도대체 뭘 보고 나를 부른 거지?’
'잘 할 수 있을꺼야. 에라 모르겠다. 그냥 화이팅이다.'
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한 눈에 보아도 안광이 빛나던, 기가 아주 쎄보이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 한 분과 그 뒤 한 눈에도 실무자로 보이는 남자 한 분이 접견실로 들어 왔다. 이력서와 자소서를 눈으로 잠깐 훑으며 면접은 시작되었다. 큰 자리든 작은 자리든 한번도 면접에서 실패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면접에는 나름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들이 원하는 명쾌한 답변을 들려 주겠노라 속으로 부르짖으며 면접을 이어 나갔다. 그 회사는 특허 기기를 기반으로 어학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영어 벤처 기업이었는데, 모 박사의 절대로 영어 공부를 하지 말라는 책을 근간으로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히는 프로그램으로 어학원을 운영하는 벤처 기업이었다. 나를 왜 불렀는지 조금은 감이 왔다. 그간의 교수 이력으로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주였고 운영에 대한 경험은 없는지 그리고 지점 확장에 따른 본사 인력 충원으로 현재 다수 건의 면접이 진행되고 있어 채용 면접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인상에 남는 질문이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 걸로 보아 업무와 관련한 평이한 질문들이 이어졌던 것 같다. 채용의 패를 쥔 건 내가 아니었기에 그간의 내 이력이 승부수가 되기를 바라며 최대한 솔직하게 그리고 자신감 있게 면접을 마무리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쇼의 무대를 옮기자 마자 바로 기회가 주어졌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운 좋게 나는 채용이 되었고, 연봉 4000만원의 대리급 직원으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운영 본부로 발령을 받아 선임 과장과 운영 지원 사업을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 회사는 큰 투자를 받아 프랜차이즈 사업이 한창 확장되던 시기여서 사무실은 늘 바쁘고 북적거렸다. 커리큘럼 내용은 연령과 인지 능력에 맞게 선별된 원서와 눈높이에 맞는 영화들을 활용해 책과 영화 속 대사를 반복적으로 따라 하며 가상으로 노출된 모국어 환경을 통해 우리말처럼 영어를 익히는 방법이었다. 단어 암기와 문법 공부가 주를 이루던 당시 영어 학습법과 달리 이러한 방식은 신개념 어학 학습법에 가까웠는데 강남 엄마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고 퍼져 설명회라도 하는 날이면 회사가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정신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쇼호스트를 준비하려던 마음이 매월 따박 따박 들어오는 안전 장치에 조금씩 무뎌져 갔다. 무엇보다 일이 너무 재미 있었다. 지난 해까지 내가 살아가던 테두리에서는 만나 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 주며 일 머리가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호흡이 끊어져가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느낌이었다. 만족스러운 현실은 꿈 따위는 조금 미뤄 두어도 괜찮다고 나를 부추겼다.
‘아직은 괜찮아. 이제 겨우 서른 하나인 걸, 뭐.’
갑자기 시작되어 버린 인생의 다른 페이지가, 앞으로도 넘길 책장이 많으니 뒤를 돌아 보지 말고 나가라고 종용하는 듯 했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조금씩 느슨해진 마음은 나를 서둘러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게 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