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변화는 격동의 시기를 동반한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일련의 사건이 필요하고 사건의 종료와 함께 일정 기간의 휴지기를 거친 후 다음 단계로의 진척을 위한 발돋움이 시작된다. 내게 일어난 개인적인 변화는 단계의 수직 상승이라기 보다는 챕터의 또 다른 국면, 즉 색깔을 달리하는 작업이었다.
상경 후 입사와 이직을 경험하기 전까지 내가 했던 일은, 너무도 동일한 (꿈 꾸기에는 안이했고 꿈을 꿀 여력도 없었기 때문) 내가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의 길이었다. 대학 졸업이 코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주변 친구들은 주로 시집 갈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한 손에 스포츠 신문을 끼고 다니며 운동 선수와 부지런히 연애를 하던 배꽃 아가씨(그녀는 결국 꿈을 이루어 야구선수와 결혼했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이별을 해 부지런히 맞선을 보던 친구(그녀도 졸업하기가 무섭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IMF가 가정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하던 공부를 때려 치운 한 친구는 골프 캐디로 나섰다가 운이 좋게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지방색이 강해서인지 모두가 서른이 되기 전 결혼으로 자리를 잡은 터였다. 부모님의 불화를 보고 자라서인지, 나는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었다. 흔들거리는 집안 형편을 생각해 우선 취직을 해야 했고, 말끝마다 'Voila'(불어 추임새)를 붙이며 깐깐하게 우리를 평가하던 최진숙 교수를 비롯한 몇몇 지인이 리포터나 아나운서 같은 방송직을 해보라고 권유 했었지만, 그 당시 그런 준비조차 사치였던 나는 결국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불어 대신 대학 내내 흥미를 갖고 놀았던 영어 능력을 살려 중고등 입시 강사로 취업해 일을 시작했다.
보수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르치는 일이 버거워 조금 허덕였지만 학생들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졸업반이던 4학년 2학기 취업 증명서를 들고 출석이 불가해진 수업의 출석 인정을 요청하기 위해 학과장실을 들렀을 때, 정년을 앞둔 한 늙은 여교수의 비아냥거리던 말투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데는 이력서만 내면 다 들어가는 데 아니가?”
저 멀리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본인이 쓴 통사론 책을 들고 아무런 필기나 설명도 없이 그저 입으로만 책을 줄줄 읽으며 매 시간을 수면과 씨름하게 만든 분이셨는데, 대학 교수님이었던 그녀의 눈에 비친 학원 강사 타이틀은 더 없이 초라했으리라. 심장이 죽어버린 세상의 기득권자들은 많고도 많으니 의미 없는 그녀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가면 족할 뿐.
그 순간 그 시절이 떠오른 건 대구에 들러 다시 서울로 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두어 달은 엄마 얼굴을 못 본 터라 다녀와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고속버스 안에서 이런 저런 회상을 하며 등을 기대고 오는 길, 어렴풋이 들리는 라디오 광고가 내 귀를 사로 잡았다.
‘EBS 온라인 강사를 공개 모집합니다’
‘자격 요건은 4년제 대학 졸업 및 예정자로써 교육에 관심이 있고 온라인 강의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었으며 모집 분야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분야이며, 원서 접수는 10월 20일까지 입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오 마이 갓! 이런 분야도 있구나. 이거 완전 나한테 딱인데?’
뒷일은 망설이지 않는 거였다. 아이스크림과 함께 하는 기나긴 방황이 이어졌지만 길이 보인다면 망설이지 말고 직진하는 거다.
그렇게 서른 몇의 시간이 저물던 겨울, 나는 한창 일어나던 인터넷 강의 붐으로 숱하게 이곳 저곳을 지원하고 시강과 면접을 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고 다행히 모두 애쓴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 주어 더는 동생에게 미안한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프리랜서 린다 정 나가신다. 모두 길을 비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