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보석 같은 시절
가을 바람이 차다. 찬 기운을 뚫고 대치동 언저리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준비한 교안을 눈으로 훑어 보고 재능 없는 손으로 대충 두드린 메이크업이 어색하지 않은지 거울로 매무새를 살폈다. 오늘은 어린이 학습지 회사에서 출간하는 교재의 서브용 강의를 촬영하는 날이다. 컨텐츠 난이도야 말할 것 없이 쉽지만, 미키 마우스 머리띠를 끼고 가끔은 요술봉을 든 채 발레용 튜튜 스커트를 입고 나의 내적 자아와 싸우며 또 다른 내 모습을 꺼내야 한다. 갑자기 지난 주 EBS 온라인 강의 댓글이 떠올랐다.
“선생님 이름은 ‘린다 정’ 거꾸로 하면 ‘질린다’네요. 하하하.”
‘아뿔사!’
이 창의적이고도 기발한 또 한편으로 허를 찌르는 말 장난을 어쩌면 좋은가? 한 중학생의 말장난이 그냥 우스개 소리로만 와 닿지 않은 건 유독 그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점이 낮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장난기 넘치는 중학생의 우스개 소리로 받아 들일 지 모르지만 나는 댓글에 상처 입어 영혼이 상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 이래서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 거구나.’
강사 등록된 내 계정으로는 결코 묻고 따지는 키보드 워리어가 될 수는 없는 현실에 안도하며, 수많은 댓글로 품평 당하는 연예인들의 기분을 아주 잠시 나마 느껴 보았다.
‘교훈은 받되 툭툭 털어 버릴 것’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새로운 신조를 만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일이리라.
그렇게 털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댓글 해프닝으로 인해 적잖이 심적 타격을 받은 나는 무엇보다 다음 강의 촬영 시 주눅 들지 않고 나의 밝고 통통 튀는 잠자는 자아를 꺼내어 기존의 텐션을 잘 유지해주어야 했다.
“헬로우, 에브리원! 점프 업, 레벨 업! 한 주간 안녕하셨나요? 오늘도 재미있는 영어 놀이로 여러분의 실력도 쑥 흥미도 쑥쑥 키워드릴 영어 선생님 린다 정이에요. 우리 친구들 반갑습니다.”
즉흥적으로 떠올리며 이렇게 저렇게 손이 오그라드는 서두 멘트를 몇 번의 NG로 시작하며 그 날의 촬영은 이어졌다. 영어 공부를 하라 마라 말들이 많지만 실은 영어라는 컨텐츠는 내용이 한정되어 있고, 한국 교과 과정에서 요구하는 영어 실력도 실은 내용이 한정적이어서 처음과 끝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상투적인 이력서 문구처럼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다년간의 강의로 촬영 준비는 늘 쉬웠고, 스스로 말에 달란트가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내용을 숙지하고 즉흥적인 제스처와 아이디어에 맞춰 강의를 찍는 일은 내게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재미있게 몇 시간 떠들며 돈을 번다고나 할까? 보통 하루 적게는 두세 강좌, 많게는 네다섯 강좌를 촬영하곤 했는데, 그 날은 두 강좌를 간격으로 옷을 갈아 입고 약 서 너 시간 동안 네 강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온라인 강의 담당팀 지희 대리가 필요한 소품을 이것저것 준비해 주었고 여느 날처럼 강의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끝나고 나면 해당 팀과 식사하는 자리도 마련되곤 했는데, 그 날은 연이어 몇 시간 말 한 터라 몸이 지쳐 마무리 촬영을 끝내고 옆에 있는 유명한 곰탕 집에서 깍두기를 말아 국물을 삼키며 혼자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전 층을 뚫은 아쿠아리움이 너무나 인상 깊던 포스코 건물 지하 까ㅏ페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며 커피를 마신 후 바로 인근에 있는 이비스 호텔 사우나로 가 땀을 빼며 앞선 시간들의 피로를 벗겨 냈다.
‘아, 아름다운 시절이여!’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시간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벨이 딱 맞는 이상적인 시간이었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그곳과는 다른 땅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늘 현재 진행형으로 사느라 결코 추억을 그리워하는 법이 없는 나에게 가장 아름답고 애틋한 돌아가고픈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그 순간들을 꼽을 것이다. 눈물 찔끔하며 목 메이도록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젊음과 자유, 그리고 부요가 거기 그 순간들에 있었다.
수많은 곳에서 나를 불러 주고, 마치 놀이동산 프리패스처럼 이곳 저곳을 누빌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직장이 아니었음에 불구하고 직장인처럼 바쁘던 시절. ebs 온라인을 비롯해 유명한 여러 업체들의 러브콜. 아침에는 어린이 강의를, 저녁이면 공무원 영어와 영어 강사가 되기 위한 분들을 위한 온라인 강의까지, 쉼 없이 일하고 달렸지만 틈새의 내 시간이면 충분했다. 피곤함보다 기쁨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황홀한 꿈을 꾸는 사람처럼 그 시절이 계속되기를 바랬다.
그 번영의 시간은 수명을 다하고 얼마 간의 시기를 거쳐 사멸했지만, 그 시절을 돌이키면 나를 충만히 허용해 준 그 시간들에 감사할 따름이다.
가장 눈부신 오후의 햇살은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이 지금 정점임을 알기나 할까? 어스름한 새벽을 가까스고 뚫고 겨우 동을 틔워 어떤 바람의 등을 타고 아침 시간들을 버텨 한낮의 중앙에 서 있는지 햇살은 과연 알기나 할까? 이제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린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 시절 나의 젊음이 바로 그 순간에 있었다. 눈부신 햇살처럼 반짝이며 등을 보이는 연잎 위 개구리처럼 그 시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