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시간은 그렇게 길게 꼬리를 내어주지 않은 채 다음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서른 하고도 중반이 가까워 올 무렵, 꺾이는 한 해의 말미가 초초하던 그 시절, 회사를 관두지 말라며 한사코 나를 말리던 유경은 나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일하는 여자들이 한번도 부러웠던 적이 없다며, 좋은 팔자에서 나온 소리인지 자기보다 뒤쳐지던 절친의 사회 생활이 부러웠는지, 가끔 가슴을 후벼 파는 철없는 소리를 하던 그녀는 나의 가장 좋은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우리는 질투라는 감정을 가진 가끔은 적대적이 되는 여성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그에 앞서 우리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모든 연애와 일탈과 때로는 삶의 축복과 질고를 함께 경험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무심하여 먼저 전화 거는 법이 없던 나에게 여느 때처럼 유경의 전화가 왔다.
“니 소개팅 안할래?”
“웬 소개팅?”
“오빠가 골프 치러 갔다가 동창을 만났는데 싱글이라 하네. 나이 점점 들면 남자도 더 귀한 거 알제? 건축 관련 사업하는데 집안도 괜찮고 사람도 괜찮다 하더라. 사람은 자고로 만나봐야 된다. 신성우나 이현우 같은 남자는 현실에는 잘 없대이. 정신 차리고 고마 소개팅 해라. 날 잡는다이.”
‘응’이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소개팅 날짜를 잡아서 다시 연락하겠다는 추진력에 꽉 찬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뭐, 심심한데 하지 뭐. 가서 밥이나 먹고 오지. 뭐’
그렇게 해서 잡은 소개팅 날짜는 2월 6일. 음력 설날이 갓 지난 추운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이제는 삼십대 중반을 향해 달리던 나이의 끝자리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지금은 늦은 결혼이 흔하지만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모두 아니 거의 다 결혼을 해서 하나 둘씩 아이를 낳던 터라 나도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독립을 꿈꾸며 상경했던 서울에서의 싱글 생활이 슬슬 지겨워지기도 했고 (라이프 스타일이 너무도 나의 이상형이었던) 서로 호감을 가진 한 사람과는 실망 끝에 만남을 종결한 터였다. 서로 분명 한동안 호감이 있었는데 호감을 갖고 만날수록 묘하게 끈이 닿지 않고 만나면 만날수록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때 배웠다. 사람의 인연은 억지로 이어 붙여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와 오해 사이의 만 가지 선들이 서로를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한다는 걸.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간신히 얼굴이 보이는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그날의 소개팅은 시작됐다. 상헌 오빠와 유경 내외 그리고 소개팅 남이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베레모를 쓰고 누빔 점퍼를 입고 의자에 기댄 모습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음식을 시키고 와인도 한잔하며 실없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부담 없이 식사하는 가벼운 자리였다. 크게 호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크게 싫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 당시 간혹 내가 싱글 임이 안타까워 지인들이 주선한 소개팅에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한번 더 만나는주마' 생각하던 나에게(지금도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애프터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주로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는데,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는 않지만 그런 경험이 연이어지다 보니 내심 위축 아닌 위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한 바탕 즐거운저녁 식사 자리를 끝내고 우리 집 앞에 내려 주는 길, 그는 조금 멋적어하며 다음에 만날 수 있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네.”
괜찮다는 수락의 말을 하고 별 다른 얘기 없이 전화번호를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의 연애는 시작됐다. 상대를 쉼 없이 분석하느라(그러고 보니 이게 이유였구나) 고작 세 번을 넘기지 못하고 흥미를 잃어 하던 나의 오랜 싱글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베레모를 쓴 선한 인상의 그는 바쁜 중에도 나를 만나러 저녁마다 우리 집 앞으로 와주었고 특이하게도 만날 때마다 좋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서너 번 만나도 한결같이 점잖던 그에게 잠실에 식당 중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먹고 나오며 내가 먼저 슬며시 팔짱을 꼈다. 크레센도로 시뻘개지는 얼굴에 웃음이 나며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은 내게 더 호감을 주었다. 그리고 매일 구두만 신고 다니던 나에게 어느 날은 백화점 앞으로 오라며 점심 시간에 운동화를 사주겠노라고 했다. 같이 매일 걷자고 말하면서. 그리고는 강남 골목길을 걷기도 하고 당시로는 힙하던 압구정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마시고 한참을 걷다 헤어지기도 했다. 그가 사준 운동화를 신고 지인들과 이름 있는 삼청동 와인바에 모여 술을 한잔 걸치고는 경복궁 돌담길 옆을 뛰어 다니기도 하고 외곽이나 인근으로 드라이브를 가 시들시들 피어나려는 풀꽃들을 보며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결혼을 결심한 건 늘 나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며 어느 순간 잡게 된 그의 손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푸근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손은 한마디로 뜨뜻했다. 곰살 맞은 그의 손이 푸근하고도 따뜻했다. 그의 손에서 지난 날 애쓰며 살아 왔던 모든 삶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남자와 살면 푸근하고 따뜻하게 살겠구나.’
‘아, 너무 포근하고 푹신하다.’
바쁜 부모에게도 받은 적이 없던 위로를 그에게서 받은 느낌, 그렇게 우리는 양가의 허락을 받고 청담동에서 남들 다하는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코스를 거치고 예물 문제와 신혼집으로 투닥대며 9개월 만에 결혼했다.
가끔 그 날 그게 청혼이었냐고 비꼬는 나에게 너처럼 멋없는 여자는 없을 거라고 남편은 이야기하곤 한다. 날이 좋은 주말 저녁 호텔 풀사이드 바베큐를 예약해 둔 남편은 그 자리에 한 눈에 봐도 너무 작아서 반지가 들었을 법한 작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왔더랬다.
“그거 뭐야? 내 반지야?”
꺼내서 껴보라는 남편 앞에서 연 작은 상자 안에는 알이 작은 알이 박힌 백금반지가 들어 있었다.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커플링에 기뻐하며 ‘근데 이거 청혼은 아니지?’ 라고 웃으며 묻는 나에게 그는 멋적게 웃으며 ‘이거 청혼이야’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도 가끔 서로 ‘누가 제대로 청혼을 하지 않았나’와 ’누가 청혼의 자리를 김새게 만들었나’를 가지고 쓸 데 없는 공방을 하곤 한다.
결론은, 청혼의 세심함이 모자랐던 남자와 모른 척하는 미덕이 부족했던 경상도 남녀 한 쌍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고, 질고의 세월도 함께 견디며 우리의 결혼 생활은 지금까지도 잘 이어지고 있다. 내 인생에 가장 따뜻했던 남자, 나를 가장 잘 읽어준 사람, 지는 일몰을 바라보며 미래를 이야기 하고 싶어 하던 그에게 코스 요리가 너무 느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고 불평했던 부족한 내게 선물을 가장 많이 해준 사람, 사람이 하는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사람.
‘오늘도 변함 없이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나는 다음 생에도 당신을 남편으로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아.’
물론 당신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