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이 되면 뜨끈한 황태국이 생각난다. 태어나서 내가 먹은 제일 맛있는 황태국은 서울에서 나의 두 번째 회사가 위치했던 공덕역 인근 지하 상가 식당이었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는 단 한번도 황태국을 끼니나 해장국으로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는데 회사 선배를 따라 어느 점심 시간 마지 못해 들어간 황태 국밥집은 그야말로 황태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기존의 내가 알던 황태국의 맛이 고소하고 깔끔한 수준이 그쳤다면 (지금은 상호도 기억나지 않는) 부부 내외가 점심 장사만 하던 그 국밥집 황태국은 깊고 푸짐하고 구수하고 고소하고 달큼하며 담백한,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그런 맛이었다. 쌀쌀한 날씨에 움츠렸던 어깨를 펴주고 지루한 오전 시간을 위안해주며 다가오는 오후를 새롭게 열어주는 맛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맛볼래야 맛볼 수 없는 담백 구수한 뿌연 국물과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건더기의 하모니가 그리운 밤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결혼 생활도 그렇게 구수했던 황태국 같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늘과 햇빛을 번갈아 널린 명태가, 된 바람을 거쳐 뜨거운 열기를 딛고 마침내 꾸덕하게 때로는 바싹, 보기도 먹기도 좋게 말린 황태처럼 수많은 갈등과 화해와 오해와 이해를 지나 이제는 서로가 꾸덕해질 대로 꾸덕해진 그래서 이제는 우려 제법 뿌연 국물을 낼 만한 수준이 된 황태국 같은 생활, 그것이 우리 결혼의 현재 주소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거치는 달달한 허니문 단계를 지나 서로의 열정과 서투름, 인생의 절반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각자주인이 되어 살아와 다르게 확립된 가치관과 습관, 그리고 행동 양식, 거기에 서로의 가족이라는 식구들이 함께 끼어 들면서, 부부의 결혼 생활은 새로운 그림을 그려간다. 예상에 없던 등장 인물이 새로운 구도 속에 복병처럼 등장하기도 하고, 원하는 색이 잘 덧입혀진 단순화된 구상화를 그리려던 서로의 원래 취지와 달리, 때로는 복잡해진 구상 속 뒤죽박죽 섞인 모양들을 다시 수정해야 하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색의 부대낌을 다른 물감으로 덧입혀 전체적인 하모니를 다시 만들어 나가야 하기도 한다. 우리의 결혼 생활도 그랬다.
광화문 인근에서 간단한 상견례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당시 나의 예비 시어머니였던 돌아가신 어머님은 무엇이 시발점이었는지 알 수 없는 문제로 정신과에 한동안 입원 하셨다.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과업이었던 우리 집에서 도무지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시어머니가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자연 치유를 하실 때까지 여러 병원의 병동으로 문병을 가야 했고, 결혼할 때까지 그런 상황을 나에게 언질 하지 않은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한 달에 한번 여자만이 겪는 마법의 날이 되면 평소와는 다른 호르몬 체계로 몹시 예민해지던 내게 남편은 나의 불안정한 심리를 어머니와 오버랩 시키며 병원 상담을 권유하기도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을 이해하지만 졸지에 솥뚜껑이 되어 나의 현상을 오해 받아야 했던 일은 한동안 남편을 향한 나의 분노 거리였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가족을 아주 유심히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관객이 되어 관찰하곤 했다. 살아온 배경과 가족 내 분위기가 너무 달랐기에 스스로 풀썩 뛰어들기 보다 실수 없이 적응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구간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삐죽삐죽 살아 숨쉬는 나의 친정 가족이 조금 부끄러웠던 적도 있고 남편 또한 자신의 가족에게 그러함을 느꼈을 터. 그리고 이제는 시간이 지나 우리 부부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세월의 정을 맞고 인생이라는 큰 스승을 통해 성장하며 더 둥글둥글해졌다. 그래서 가끔은 서로간의 격이 없어 버거울 때가 있는 친정 식구보다 선을 지키며 작은 호의에도 크게 감사해주는 시댁 식구들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지금은 옆에서 들리는 코골이 소리가 정겨운 리듬으로 안정감을 주지만 한 이불을 나눠 덮는 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이불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해프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의 테두리를 벗겨 새롭게 알록달록 짜여진 이불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연애의 시작은 호감이고 연애가 결혼이 되는 건 환상이다. 그리고 마침내 엉겹의 연을 뚫고 만난 서로는 수많은 좋은 날과 궂을 날을 거치며 성장해 나간다. 그렇게 물과 불을 거쳐 꾸덕해진 우리는 이제는 제법 숨만 쉬어도 서로의 마음을 읽으며 네가 나를 위해 내가 너를 위해 감내해주는 부분을 감사하게 된다. 내 곁에 와 볼 것 없는 내 인생의 질고를 같이 짊어진 그 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섞어 우리는 결국 서로 먼저 질 줄 아는 사랑을 하게 되었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사랑은 믿고 하나되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 없네
여전히 가끔 크고 작은 짧은 전투를 거치는 나의 전우는 이제는 적이 아니라 손을 맞잡은 동지가 되었다.
여보!
날이 쌀쌀하다.
쌀뜨물 우려 황태국 끓일까 봐.
고슬고슬 찢은 황태 참기름에 달달 볶아서 뿌연 국물에 무 넣어 구수하게 끓여 먹자.
지나간 모든 날보다 오늘 더 고맙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