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은 다른 곳에
큰 아이가 장염으로 1주일 고생 후 주말 동안 괜찮아져서 이것저것 먹을 거 다 먹고 좋은 컨디션으로 월요일에 등교했는데 또다시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 OO가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다고 하네요. 추석 지나고 매일 같이 보건실에 오고 있어요. 혹시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 큰 병원에 한 번 가보심이 좋을 것 같아요."라며 보건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서 반차를 쓰고, 급하게 업무 마무리를 한 후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상급병원으로 향했다.
상급병원 과장님이 청진도 하시고, 배도 이곳저곳 눌러보고 두드려 보고 하셨는데 아이가 여기도 조금 아프고, 저기도 조금 아프고, 또 그러고는 잘 모르겠단다. 과장님이 계속 고개를 갸웃갸웃하시더니 입원해서 CT를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신다. 사실 장염으로 CT라니 싶은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으나 아이가 열흘 가까이 병원을 두 곳이나 다녔으나 차도가 없고, 계속 미열과 설사 증상이 있다고 하니 원인을 찾아내야겠단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두 말 않고 입원 후 CT촬영을 하기로 하고, 그 외 피검사와 변검사, X-ray까지 모든 검사는 다 하기로 했다. 아이에게 조영제를 투여해서 CT를 찍으려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원인 모를 질병에 감염이 된 건 아닐까 오만 가지 생각이 들어 불안한 마음은 눌러두고 모든 검사 후 확실한 원인을 알아야 했다.
아이라서 그런지 입원 후 CT 및 모든 검사를 우선순으로 진행해 주셔서 몇 시간 내 바로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장염. 다른 원인이 있지는 않았다. 다행히 다른 질병이 아니라서 한시름 놓았지만 계속되는 설사증상이 있어서 목요일쯤 퇴원해도 되겠단 과장님 처음 말씀과 달리 하루 더 있어보기로 했다. 주말 전에는 퇴원하겠지 했는데 또 하루 더 있어서 결국 토요일에 퇴원하기로 하고, 토요일 아침 한 번 더 피검사 후 이상 없다는 소견을 받고 퇴원 결정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장염이 아니었다. 원인은 장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가 퇴원하면 안 될 것 같다면서 아침 먹은걸 갑자기 다 토하고 오고, 설사도 다시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건 무슨 일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아이가 집에 가면 핸드폰 게임 앱을 다 차단하지 말고 열어달라, 머리도 갑자기 아프다, 하루 더 있다가 가든지 월요일에 가면 안 되냐 등의 말을 했었다. 천천히 이 말들을 종합해 보니 게임을 계속 못하게 되니 퇴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집에 가면 엄마가 핸드폰 게임 앱도 시간제한을 걸어둘 것이고, 미뤄둔 공부도 해야 할 것이니 병원에서 마음껏 게임할 생각에 퇴원을 미루고 싶었던 것이다.
병원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얼마나 지루하겠나 싶어서 핸드폰 앱에 있는 게임도 열어주고, 게임 시간을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허용해 주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급기야 갑자기 게임중독 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결국 소아청소년과 원장님께 살짝 따로 가서 이 사실을 설명드렸더니 웃으면서 아이에게 다시 오셔서 친절하게 조곤조건 설명해 주셨다. 피검사 결과 이상이 없고 설사를 조금 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집에 가서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죽 먹고, 몸이 좀 괜찮아지면 게임도 좀 하게 해달라고 하라면서 아이를 타일러주고 가셨다. 그래도 집에 가기 싫다며 고집부리는 통에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엄마는 갈 테니 혼자 있어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낮에는 할아버지가 함께 있어주셨지만, 병원에서 며칠을 보조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아이를 돌보고 출퇴근하느라 힘겹게 퇴원할 날만을 기다리며 버텼는데 퇴원이 미뤄지니 사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입원하기 일주일 전부터 아이 간병하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는데 2주가량을 계속 아프다고 하는 아이가 퇴원까지 거부하는 통에 화가 폭발해 버렸다. 결국, 손자 걱정에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신 할아버지께서 야단도 치고, 타이르기도 하시면서 어르고 달래 힘겹게 퇴원수속을 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잘 지내다가 학교에 가야 하는 월요일 아침에 등교 전 갑자기 열이 난다며 출근길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서 학교는 가지 못하고, 할아버지께 부탁드려 화요일 외래진료 보러 오라고 한 것을 하루 당겨서 외래진료를 보러 갔다. 목이 조금 부은 것 같다고 감기약을 처방받아와서 집에서 하루 쉬고 내일 학고 가기로 했다.
다음날, 이번에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갑자기 열이 난다며 해열제 먹고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보고 학원을 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또 독감에 걸린 것 같다며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퇴근 후 병원에 가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어, 할아버지께 병원에 함께 가주십사 부탁드렸더니 곧이어 전화가 와서 독감 아니라고 결과가 나왔다고 하고 약은 기존에 먹던 약이 있어서 안 받았다고 했다.
여기까지 상황에 이르자 갑자기 엄마 촉이 발동했다. 혼자 있을 시간에만 갑자기 열이 난다고 하고, 이후에는 열이 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다른 증상이 없다고 하는데 계속 머리가 아프다, 열이 난다고 하는 게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면서 오늘은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아이를 불러서 추궁을 했다. 집에서 혼자 열난다고 해열제 먹고 바로 잤느냐, 데스크톱으로 게임을 했느냐고 물으니 우물쭈물하는 것이 미심쩍었다. 마침 퇴근하고 오는 아빠가 이 상황을 목격하고 컴퓨터 켜서 게임한 시간 확인해도 되느냐고 하니 그제야 게임을 했단다.
세상에... 맙소사! 아들에게 속은 기분, 배신감이랄까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 이 아이를 어찌해야 되나 싶었다. 그동안 아프다고 하는 통에 걱정하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왜 이리 낫지 않는가 생각했는데 아이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면서 너무 화가 나니까 말도 안 나왔다. 순간, 아이에게 남편이 사랑의 궁디(엉덩이)팡팡을 할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이를 불러서 조곤조곤 얘기하며 엄하게 야단을 쳤다. 앞으로 부모님 허락 없이 데스크톱 사용금지, 데스크톱 손대서 걸리면 모든 게임 계정 삭제. 당분간 게임 금지령을 내렸다. 그랬더니 아이도 더 이상 자기가 한 잘못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아프다고 학원을 안 갔던 것도, 화장실이 급해서 큰 볼일 보느라 학원을 늦게 갔다고 한 것도 게임하느라 핑계를 댔던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아프다고 함께 병원 가주러 오신 날도 게임한다고 안에서 문 걸어 잠그고 안 열어주었던 적도 있었다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것저것 다 생각해 보니 너무 화도 나고 괘씸해서 한 동안 아이가 왜 그리 밉던지.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나도 엄마 몰래 거짓말한 적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몰래 한 적도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엄마 몰래 거짓말하고 게임한 것도, 열이 안 나는데 열이 난다고 거짓말한 것도, 모두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뒤늦게라도 솔직히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니 용서해 주었지만 이 또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주말마다 주어진 숙제나 과제를 마치고 나면 게임을 네다섯 시간씩 하게 해 주었음에도 게임에 중독된 듯 홀려서 매일매일 하고 싶고, 더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직은 조절이 힘든 나이다 보니 어른들이 조절해 주는 것이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아이에게만 게임에 중독된 것 같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게임하기보다 함께 대화하고, 책도 읽어주고, 놀이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OO아버님~게임 좀 그만하시고, 아이들과 시간을 좀 보내주시지요. 아이들 크는 거 금세인데,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