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는 잘 때 손가락을 빠는 습관이 있다.
매일 밤 그만하자 말을 해도
매일 밤 엄지를 입 안에 넣고야 마는 아이.
엄마 말에 그러겠노라 쉽게 대답은 하지만
쉽게 나온 대답만큼 번복도 쉽다.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아이에겐 안식처와 같다는 걸 알면서도
혹여 치아가 틀어지기라도 할까,
아토피가 심한 아이기에 발갛고 쭈글거리는 엄지 손가락이 눈에 밟혀서,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하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손 빨지 말라고 했지!"
아이는 어둠 속에서 끔뻑끔뻑
잠에 빠져들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빼고는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려버리곤 했다.
그런데
거듭 말하기가 입 아프고 마음도 아파 며칠을 몬 본 채 했던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말을 않아도
스스로 손가락을 물지 않은 채 손을 가지런히 몸 옆에 두고 잠이 들었다.
다른 날에는 다시 손가락을 물기도 했지만
또 어떤 날은 물지 않고 잠들기를 여러 번.
아이는 점차 그의 오랜 습관 없이 잠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 정말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빨리'.
아이들은 아직 모든 게 서툴기도 하거니와
서툰 신체에 비해 호기심은 지나치게 많다.
안 그래도 성인보다 뭐든 시간이 더 필요한 미숙함에
온갖 궁금하고 흥미로운 것들이 얹어져
결과 하나를 얻으려면 본래 아이들이 낼 수 있는 느린 속도에서도 세 배는 더 지체된다.
산전수전 공수전 다 겪고
익숙할 만큼 익숙하고 능숙할 만큼 능숙해진 어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속도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이 가슴이,
머리를 따라가질 못한다.
해서 아이에게 자꾸만 '빨리'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당장 눈앞에서 행동 하나를 빨리 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있지만
아이가 어떤 새로운 것을 하나 배울 때에
어른 생각만큼 빨리 되지 않으면 그게 참 초조하곤 하다.
'시간 지나면 알아서 다 해.'
아이를 키우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리도 하나를 새롭게 배울 때가 되면 매번 조바심이 나는지,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없다가 급작스레 수직을 그리며 성장하는 게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뜻대로 빨리 되지 않으면 아이를 닦달하곤 한다.
그 예가 바로 손 빠는 아이와 이를 고치려던 나의 모습.
배변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낮기저귀는 바로 떼버려 어른들을 놀라게 했지만
낮과 달리 밤에는 이불에 매일같이 지도를 그리던 나의 아이.
낮기저귀처럼 빨리 뗄 수 있을 거라 기대에 찼던 엄마가
아침마다 왠지 화가 난듯한 뒷모습으로 빨래하던 날들을 지나
밤기저귀 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저 기저귀에 싸지 않고 변기에 싸는 것이라 한 번 일러주는 것으로 아이의 지도를 눈 감아주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냥 어느 날부턴가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보송한 속옷으로 혼자 일어나
스스로 옷을 벗고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고 변기 뚜껑을 닫고 소변을 내린 뒤 손까지 씻는 일상이 지속됐다.
내가 아이에게 특별히 방법을 바꾸어 한 것은 없었다.
그저 아이의 속도를 인정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꾸준히 읊어주니
어느 날부턴가 배운 대로 하고 있었다.
아직도 완벽하진 않다.
그렇지만 아이는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빨리'라는 말을 내세워 아이를 재촉하지 않아도
아이는 엄마가 일러준 방향을 기억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그 길로 가고야 말았다.
그러니 애초에 아이에겐 화를 곁들인 '빨리'라는 단어를 내밀 필요가 없었다.
참 웃긴 것은
이 사실을 깨달은 요즘이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당장 오늘도
난 아이에게 '빨리'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느리게 하라고 해도
빨리도 무언가를 배우고 고친다면
어른인 나는
굳어지고 고집이 되어
그놈의 '빨리'가 지독히도 안 된 채
아직도 똑같이 아이에게 잘못하고 밤마다 용서를 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내게는 아이라는 선생이 있기에.
뒤끝도 꼬인 것도 없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사과할 것이 있다면 그저 안아주는 내 아이가 있기에
그런 아이를 보고 배우고
그런 아이 손에 키워지는 나는,
부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