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있었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굵고 단호한 빗줄기는 잔잔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흐린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문득, 오래전 한 장면을 떠올렸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할 거리였지만 그녀와 단짝친구는 굳이 달동네 골목을 걸었다.
약간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늘 그랬다.
버스에서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만화책 이야기, 게임 이야기, 시험과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그 길 위에서만 꺼낼 수 있는 말들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둘은 황급히 근처 빌라의 공동현관으로 몸을 피했지만,
금세 그칠 비는 아니었다.
달동네는 비슷비슷한 골목이 겹겹이라, 우산을 살 만한 가게가 어디 있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리 그냥 걸을까?”
그녀가 무심히 말했다.
“그래.” 친구도 담담히 대답했다.
쏴아—
빗줄기는 금세 옷을 적셨고,
빗물은 머리카락을 타고 신발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래도 걸었다.
덥고 끈적한 여름날보다 낫다고 서로를 향해 웃으며 위로했다.
말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마음은 함께 있었다.
젖은 친구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나도 지금 저렇겠지.'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누가 창으로 둘을 봤다면
‘왜 비를 맞고 걸어?’ 하고 고개를 갸웃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그들에겐 모든 것이 괜찮았다.
젖은 머리, 흐르는 빗물,
‘찌걱찌걱’ 골목을 울리는 신발,
예상치 못한 일탈.
모든 것이 웃음으로 남았다.
“너랑 있으니까, 비를 맞고도 괜찮은 것 같아.”
“이런 경험, 언제 또 해 보겠어.”
“저 웅덩이도 그냥 지나가자.”
그렇게 서로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젖은 그녀를 보고는 눈이 커졌다.
“뭐야, 비를 맞고 왔어?”
꾸중은 없었다.
어쩌면 엄마도 그날의 공기를 알아차렸던 걸까.
샤워를 마치고 숙제를 하려던 그녀는
젖은 교과서를 보고 잠깐 당황했다.
모서리가 물에 불었고, 사인펜 자국은 번져 있었다.
해방감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 어쩌지.’
그날의 기억은 오래도록 그녀 안에 남았다.
젖은 교과서처럼 쭈글쭈글해졌지만,
그날의 해방감, 웃음, 젖은 옷의 무게까지
그녀 안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친구.
함께 비를 맞아준, 엉뚱하고 다정한 친구는 그녀 삶에 어딘가에 늘 머물러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는 늘 그녀에게
틀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각자의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녀는 예상 궤도를 자주 벗어나며 흔들렸지만,
친구는 사회적으로 단단하고 안정된 길을 걸었다.
7년 넘게 연락이 끊긴 시기도 있었지만 그녀는 연결이 완전히 끊긴 적은 없다고 믿었다.
어느 날, 친구가 곱게 색동옷을 입고 아주 밝은 얼굴로 결혼식을 올리는 꿈을 꾸었다.
눈을 뜬 뒤에도 그 장면이 또렷이 남아, 그녀는 아침이 되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에 네가 결혼하는 꿈을 꿨어." 그녀는 생생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 듣고 난 후 친구는 "사실 나, 청혼받았어. 이제 결혼하려고."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어제 이어 말한 대화처럼 늘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친구가 임신을 하고 몇 달 후, 그녀는 졸업한 육아를 다시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친구에게서 선물이 하나둘 도착했다.
디카페인커피, 고체향수, 그리고 생화.
이유는 간단했다.
“임신 축하해. 우리는 또 동지가 되었어.”
그녀는 포장지를 풀던 손이 멈췄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울컥했다.
결핍이라 여겼던 시간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씻겨 내려간 자리에 남은 것은,
꾸중 대신 엄마의 놀란 눈빛,
그리고 예상치 못한 친구의 선물에 담긴 말없는 애정이었다.
말보다 오래가는 마음은,
그렇게 곁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