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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May 12. 2024

막내아들의 제사 쿠데타

작년 시아버지 제사를 모신 자리에서 큰 형님께서 더는 제사를 안 지내겠다고 선언하셨다. 형제들끼리 돌아가며 지내자, 함께 성묘나 다녀오자 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둘째 아주버님이 제사는 맏이인 큰형 집에서 꼭 지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급기야 형제의 난이 시작됐고 막내인 남편의 중재에도 일이 자꾸 꼬였다. 늘 우애 좋아 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시댁이었다. 제사를 둘러싼 형제의 갈등을 보면서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구나 싶은 마음에 어수선한 날들이 흘렀다.

제기도 없어 짝이 하나도 안맞지만...


올해 시아버님 기일을 앞두고 심란해하는 남편을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찌하고 싶은 거야? 형들 눈치 보지 말고.”

우물쭈물하던 남편이 그랬다.

“나야 뭐 제사 모시고 싶지. 아부지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그래? 그럼 당신이 지내.”

“진짜? 그래도 돼?”

“자기가 음식 준비하면 되잖아. 난 옆에서 거들기만 할게.”

신이 난 남편은 몇 번이나 진심이냐며 내 의사를 확인했다. 이렇게 사라질뻔한 시아버지의 제사 불씨는 다시 타오르게 됐다.     


장을 볼 때면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남편이 이번엔 앞장을 섰다. 떡을 사고 포를 사고 나물은 얼마큼 사야 하냐며 물었다. 재래시장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시키지 않아도 냉장고에 넣기까지 했다. 주방을 얼쩡거리며 “뭐 할까?” 수시로 물었다. 설거지도 눈치껏 했다. 새벽부터 종종거린 덕분에 각종 나물, 부침개 몇 개, 고기, 탕, 과일, 포가 차려졌다. 올려놓고 보니 몇 가지 없는데 뭐 이리 분주하고 수고스러운지 모르겠다.

“아부지가 고기는 별로 안 좋아하셨어. 지나고 보니 못 먹어봐서 그런 걸 거야.”

“아버님이 내가 끓은 김치찌개를 진짜 맛있게 드셨는데. 밥 한 그릇 뚝딱하셨지.”

고기를 구우면서, 탕을 끓이며 그리움이 더 짙어지고 선명해졌다. 남편은 평생 땅 일구시며 자식 6남매를 키우신 아버지를 한 남자로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 반만큼이나 할 수 있을까 자문했다.

형들의 빈자리가 속상한지 남편은 자꾸 한숨을 쉬었다. 큰 시누네 가족이 도착하니 벌써 밖이 어두컴컴했다. 슬슬 시작해 볼까나?      


“할아버지 할머니 지방은 안 썼나?”

매형이 한소리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를 없애면서 아버님 제사와 합친 걸 깜빡했다. 남편은 다시 책상으로 가서 지방을 쓰기 시작했다. 밥그릇 국그릇 수저 세트를 준비하느라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고조라고 썼네. 증조라고 다시 써라.”

매형에게 자꾸 퇴짜 맞는 남편. 꼭 선생님에게 검사받는 학생 같다.

“앗, 글자가 또 빠졌네.”

이번엔 종이를 들고 나오다가 다시 들어갔다.

지방 세 개를 나란히 붙이고 보니 뭔가 어색했다.

“아부지 지방이 너무 작네 작아. 다시 쓸게요!”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제사가 시작됐다.


,조카,누나,마누라를 대동한 남편이 먼저 절을 올렸다. 엄숙한 제사가 이렇게 웃기고 발랄해도 되는 거야? 절을 하고 일어선 남편이 대뜸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주형아, 그다음엔 뭐 해?”

조카에게 순서를 묻는 이 사람 참 어이없다.

“외삼촌, 술을 따라서 올려야 해요.”

역시 맏이는 다르다.

“삼촌, 술을 따를 땐 세 번씩 나눠서 부어요.
 오호~~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직접 주도하니 기억도 어렵고 힘든가 보다.

남편이 갑자기 웃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비뚤비뚤 휘갈겨 쓴 낯익은 글씨체. 저건 뭐지? 예정에 없던 순서였다. 갑자기 축문이라는 걸 읊기 시작했다.

“유세차 2014년 음력 3월 26일, 효손 *규는 감히 고합니다….”

낯선 톤과 내용에 딸과 조카가 킥킥 웃었다. 2014년은 또 뭐야. 연도를 틀렸네! 틀렸어.

“해가 바뀌어 아버님 돌아가신 날이 돌아오니, 영원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맑은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공경을 다 해 받들어 올리니 흠향하소서.”

장난으로 듣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진지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애절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축문을 제사상에서도 읽을 수 있나? 형식도 중요하다며 제사를 지내고 있는 아들은 형식 파괴를 외치며 뭐든 맘대로 하고 있다.


향냄새 가득한 아들 집에서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의 마음을 받은 아버님은 날아가는 지방 연기와 함께 다시 떠나셨다. 남은 후손들은 음복하며 자린고비였지만 자상하고 세심한 아버지를 추억했다. 제사를 처음으로 주관한 막내의 실수 퍼레이드와 축문 원맨쇼에 웃음꽃이 더해졌다. 남편은 내년엔 아예 긴 편지를 써서 읽겠노라고 다짐했다. 우리 보고도 할 말 있음 다 써서 읽으라고 덧붙였다.     


어렸을 적부터 맏이가 되고 싶었던 남편은 드디어 소원성취했다며 좋아했다. 제사상을 직접 차린 것을 한없이 뿌듯해했고 그 시간이 행복했단다. 아버지를 제일 따르고 좋아하는 아들이 밥을 해드렸으니 당신도 얼마나 뿌듯하시겠냐면서 말이다.

옆에서 딸이 구시렁거렸다.

“아빠가 조선시대 왕족으로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야. 하마터면 이방원 딸내미 될 뻔했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한텐 이런 제사상은 기대도 하지 마. 서진이랑 나는 위패 가방에 넣고 뷔페 갈 거야. 골라서 드셔.”

속없는 남편은 그것도 좋다며 연신 웃었다. 그래 죽은 뒤에 다 무슨 소용이겠나. 제사고 뭐고 다 살아있는 자의 위안이고 위로인 것을.

흠향하소서~~ 어렵다 어려워
틀려서 쓰고 또 쓰던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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